우리는 모두 코드화된 존재들이며 그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썼다
약봉투는 축축했고 손끝은 축 늘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가볍고 동시에 무겁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신호등의 색깔도,
지금 이 계절이 무슨 계절인지조차도 인식되지 않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유하고 있다.’
무기력했다. 피곤했고, 졸렸다.
그 어떤 것도 이젠 상관없다.
무겁게 끌어당기는 감각만이 하루를 지배하는 날들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제 벗어 둔 옷이
아직도 의자에 구겨져 있었다
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테이블 위의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잔 안의 액체가
가장자리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문득, 어떤 열이
잠깐 심장 언저리를 스쳤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감각.
무중력 상태의 의식을
누군가 속삭이며 지표로 끌어당기는 순간처럼
그 감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작은 결심 하나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라도 내 감정을 돌봐주자.’
그 누구도 몰라줘도, 붙잡아주지 않아도
이제는
자기 자신만큼은 포기하지 않기로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은 취할 때만 생기는 걸까
그냥 숨 쉬고 있는 것뿐이다
그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처럼
문득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살아도 될까
그리고 대답은
항상 양심에 찔리는 쪽이었다
하지만 진실한건
어제의 감정만큼은 유일하게 나를 데웠다
어김없이 집을 떠올리면
답답한 공기와
쌓인 말들
그리고 모든게 막혀 있는 벽이 떠오른다
동시에 뭐든 마시지 않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주위 사람들
산소가 희박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어느 날 밤
그는 습관처럼 흘러가는 대화를 나누다
문득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아—
나는 지금
언제든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 살고 있구나.
항상 그랬던 거구나
무성하게 자라 있던 어떤 생각이,
물을 가득 머금은 화분째로 떨어졌다.
메마른 머리를 겨냥한 듯이
바로 옆에 있어도,
너무 멀리 있는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거리.
끊긴 선들 사이를
나는
묵묵히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