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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Jul 02. 2023

사랑하는 일2

사랑받을 '준비'가 진정 되었는가, 준비 없이 꿈꾸는 관계는 오지 않는다

최근 연애를 시작했다. 원래도 만남에 있어 진중한 편이지만, 가뜩이나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낮아진 지라 이번에 연애를 하게 되면 그게 언제든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다. 마침내 오래 보고 싶은 그런 친구를 만났을 때에야 마음이 동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만 나이로 법이 바뀌고 보니 나는 여전히 어린 것 같고 그런 깊이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친언니가 다녀간 뒤로 가까운 관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도 다시금 살짝 끓어오른 상태였다. '아무래도 아직은 더 열심히 놀아야겠다'라는 생각과 '부담을 더는 연습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움직였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삶을 확장해보겠다는 의지로 연애를 시작했다.(의지를 품었다고 실현해낼 수 있었다니, 운이 좋았고 타이밍도 나를 도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연애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이 일절 없던 건 아니다. 나야 이런 마음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상대의 온도는 다를 수 있으니까, 그걸로 상처를 주지는 않아야 한다는 '사람의 도리'를 고민했다. 그마저도 길지는 않았는데, 부질없는 잡념일 수 있으니까. 무엇을 하든 해보기 전까지 지나친 예측과 걱정은 금물이라고 살면서 배웠다. 해보면서 조금씩 다듬고 조정해도 괜찮다는 말이었고, 그간을 돌아보았을 때 유효한 조언이었다. 대신 연애를 시작한 뒤에 가급적 편하게 지내려 애썼다. 잘 보이려 애쓰기보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서로에 대한 기대를 높일수록 만남은 무거워지기 마련이고, 그 무게를 지려면 그만한 각오와 책임 의식이 필요했다. 나는 아직 그런 건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인간관계라는 점을 나는 망각했다. 편히 지낸다는 것이 결코 나의 편의만 생각하는 일일 수 없다는 점을, 적당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 무심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 친구와 연인의 차이는 섹스뿐이라고 주장해왔으면서, 친구나 동료들에게도 신경써온 존중과 배려를 정작 '더 가까운 관계이기를 선언한' 연인에게는 내어주지 않고 있던 것이다.  오래 연애를 쉬었으니 시행착오를 겪을 줄은 알았지만 관계에 관해 고심하고 성찰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갈고닦아왔기에 이러한 깨달음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모든 관계의 기능이 비슷하다고 했지만 사실 다르다고 믿고 있던 것은 아닌지, 다른 것이 맞는데 내멋대로 벅벅 우겨온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고, 일견 희미하게 남은 연애에 대한 편견을 발견한 듯했다. 다행이라면 지난 훈련의 과정들이 결국 이런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었고, 관계가 오해나 어깃장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바꾸어야 할 관점이나 태도가 무엇인지 바로 보게 해주었다.   

그는 기꺼이 그의 일부를 덜어내 나라는 세계로 채울 태세가 되어 있었다. 나를 탐구하고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 사랑은 가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 만나기 어려운 모양이다. 반면 나는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을 단 하나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모든 순간에 나를 최우선으로 삼았고, 그렇다 보니 내게 맞지 않는 그의 특성을 눈엣가시로 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이기적이었다. 실은 관계에 몰입한 나머지 점차 나를 잃어갔던 전철을 다시 밟고 싶지 않아 주춤거린 것이었지만 결국 이는 기우였고 어리석은 계산이었다. 나는 성숙해진 나를 믿었어야 했고, 나를 아끼는 만큼 존중해줄 거라고 그를 믿었어야 했다. 짧은 경험에서 온 두려움과 성숙에 대한 어긋난 자신감이 나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연인으로 나를 만들었다. 이런 내가 과연 분에 넘치는 그 애정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더 좋은 것을 갖고 싶기 마련이고, 내가 바라는 것은 상대도 나에게 바라기 마련이다. 즉 내가 원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친구든 연인이든 그런 사람들이 꼬인다. 나는 이를 두고 거울 작용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꽃에 꼬여드는 벌꿀의 원리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말로는 '유유상종'도 있지 않던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인 듯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불변으로 고정해둔 채 상대에게 기대하고 바라고만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나 역시 여기서 빗겨나지 못한 셈이다. 나는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지난 상처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있을리 없다고 이성을 곧추세우면서도 마음 깊숙한 한편에서는 지속적으로 그런 사람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우연스러우면서 감사하게도 넘치도록 애정을 쏟는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사랑 앞에 경계하며 멈칫거리는 나 자신을 보면서 받고 싶은 사랑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도 사람인지라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즐겁게 받아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사랑은 얼만큼 내어줄지 눈치를 보거나, 본인이 원하는 형태의 사랑만 강요한다면 마음이 차차 식고 말 것이다.

언젠가 친한 언니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다소 비뚤어진 페미니즘 의식을 갖고 있던 나는 이 말을 듣고 부르르르 떨었다. 왜 여자는 '사랑스러운' 존재여야만 하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녀 누구든 서로 사랑하기로 약속했다면 서로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 같다. 나라도 사랑하고 싶을 그런 사람 말이다. 언젠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상황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나라도 만나고 싶을 나'를 되찾은 덕분에 나는 모처럼 찾아든 인연과 더 깊이 있는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경계와 불안이 허물어지고 사랑스러운 그만 곁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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