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지 않는 마리아
그럼에도 미사보가 필요한 순간
하얀 미사보가 참 예뻤다.
내가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이유는 하나였다. 세례를 받은 사람만 미사보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당에 다니는 엄마를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미사에 참가했다. 10살 남짓한 소녀의 눈에 비친 미사보는 웨딩 베일 같았다. 천방지축 못생긴 개구쟁이들도 그 마법의 보자기(?)만 썼다하면 갑자기 예뻐보였다. 미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앞좌석에 앉은 여자들의 미사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앞으로 내가 쓰게 될 미사보를 상상했다. 끝부분만 장식한 깔끔한 형태부터 머리부터 끝단까지 화려한 꽃장식으로 가득한 디자인까지 이 세상에 똑같은 미사보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모두 아름다웠다.
견물생심이란 이런 것일까. 사물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나는 많고 어려운 기도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결국 세례명 마리아를 받았다. 어떤 아이들은 마리아는 너무 흔한 이름이라며 크리스니타, 스텔라처럼 독특하고 세련된 느낌이 나는 이름을 고르는 일에 집중했지만, 세례를 미사보를 쓰기 위한 관문처럼 느꼈던 나는 뭐라 불려도 상관없는 마음이었다. 엄마의 세례명이 안나여서 안나의 딸이 마리아가 되는 건 너무 당연한 수순 같기도 했다. 평범한 이름일지는 몰라도 마리아는 교과서계의 철수와 영희처럼 천주교계의 유명인사였다. 성모 마리아 상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미사보를 탐내는 어린이든 아름다운 세례명을 고르는 어린이든 간에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리라.
그토록 원했던 미사보를 쓰고 한동안은 성당을 열심히 다녔지만, 결국 다니지 않게 됐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어린이 미사 시간이 토요일 오후 2시였는데, 그 시간이 일단 불만이었다. 그 시간쯤에 MBC에서 외화 시리즈를 방영했는데, 매번 맥가이버가 사건 해결하는 것을 끝까지 다 보지 못하고 성당에 나가야 했다. 결정적으로 마음이 떠난 건 6학년 때 미사 끝나고 들어야 하는 교리 시간이 싫어서였다. 외워야 할 성경 속 인물의 이름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팠고, 다 읽은 뒤 문제를 푸는 숙제를 내줬다. 학원 숙제도 억지로 하는 마당에 교리 숙제라니! 지난주에 덮어둔 책을 한 번도 펴보지 않고 그대로 펼친다며 혼나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그저 풋풋한 청년부의 대학생들이었다.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은 가득했지만 아이를 다루는 법에 미숙했던 애어른인 상태였겠지만, 어린 나에게 그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이유는 누군가가 왜 성당에 다니지 않냐고 물어보면 둘러대기 좋은 대외적(?) 핑계다. 사실 12살의 나는 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점점 이 세상에 신이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어려웠다. 산타의 환상이 깨지듯 신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어준다는 천진난만한 시절은 이미 지난 뒤였다. 진화론을 배우고 나니 창세기는 그저 전래동화 같았다. 내 삶에 점점 신이 들어설 공간은 좁아졌다. 신부님에게 지난주 성당을 빠졌다는 형식적인 고해성사를 올리면서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누군가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다는 은밀한 고백과 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죄책감과 일탈하고 싶은 야릇한 욕구 같은 진짜 비밀은 오직 친구와 나눴다. 결국 중학교에 입학하고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성당을 다니지 않게 됐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내 사춘기였다. 부모님은 큰딸이 반항이나 일탈 없이 사춘기를 참 무탈하게 지냈다고 고마워했지만, 사실 비대해진 사춘기의 자아는 신성을 배신하고 밀어내는 대담한 일탈을 벌이고 있었다. 다만, 신이 없다고 명확하게 논증할 수 없어 그저 티 내지 않았을 뿐이지.
천주교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냉담자’라고 표현한다. 냉담. 잘 쓰지 않는 낯선 단어에 마음이 시리다. 12살 이후의 정체성을 냉담자라고 정의한다면 내 어느 부분이 그토록 차갑게 식은 걸까.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마음의 동공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재미와 기쁨에 빠져 살 때 전혀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구멍 아래 서늘한 바람이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그 밑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차가운 심해가 철렁였다. 뭍에 닿은 파도의 포말처럼 존재 자체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어딘가에 닻을 내린 마음은 자주 의심받고 부정당했다. 그럴 때면 이대로 사라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았다.
때론 이렇게 달래 보기도 한다. 내가 신을 믿지 않게 된 개인적 경험은 특별할 거 없이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고대인에서 현대인으로 발전하면서 이성에 눈을 뜨고 신과의 합일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인류 역사의 압축이 내 인생에서 짧게 지나간 것이라고.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일로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은 중세인에 비해 신을 잃은 현대인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존재의 소명을 찾아야 하고 구원해야 하는 일은 원래 고된 일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일반화해도 고통과 시련 앞에 덧없이 흔들리고 깨진 자아는 결국 무언가에 매달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매달릴수록 의심과 부정은 더 확대될 뿐이다. 일반화는 말 그대로 일반화일 뿐 구체적인 고통을 감싸안을 수 없었다. 결국 냉담자로서 자아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체념과 깨달음 사이의 어중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 대학교에서 처음 알게 된 기독교인들은 강인해 보였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을 준다고 말한 친구도 있었고, 고민이 있으면 기도를 통해 답을 찾는다고 고백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그때의 나는 저 말이 정말 진심일까 의심하기도 했고 조금 부러워하기도 했다. 굳건한 신앙심이 있었다면 나도 저들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신앙을 가졌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은 아직은 그렇게 되어본 적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답을 알 수 없을 뿐이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진실은 늘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냉담도 영원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먼 훗날 영성을 찾게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간 성당 미사는 최악의 이별을 겪은 뒤였다. 나에게 정말 희생적이었던 남자친구가 잠수 이별을 탔었다. 그의 방식은 점점 나를 집착하게 만들었다. 그는 나에게 너무 미안해서 이별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해하는 마음으로 성당 미사에 갔다. 그곳에서 눈을 감고 열렬하게 기도했다. 그가 영원히 불행하기를. 신에게 그를 영원히 벌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눈을 뜨자 입에서 쓴맛이 났다. 젠장. 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 난 대체 누구에게 무엇에 매달린 거야. 그때 눈앞에 하얀 미사보들이 반짝였다. 아, 왜 여전히 이토록 아름다운 거야.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신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떠났지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미사보처럼 여전히 내 눈앞에 살아 있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미사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저주를 퍼붓고 일그러진 내 표정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수의 한 조각은 이미 바다 멀리 날아갔다. 물결 위를 둥둥 떠다니다 거대한 파도가 덮치자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