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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Apr 28. 2024

별 헤는 허무의 밤이 사랑이 되려면

매일 허무의 발톱은 자란다

잠들기 전 남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8명의 천문학자가 쓴 <90일 밤의 우주>라는 책이다. “잠들기 전 짤막하게 읽어보는 천문우주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90개의 목차의 글은 짧고 쉽게 쓰였다. 무엇보다 잠들기 전 우주와 별에 대한 이야기라니.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잠들면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를 둥둥 떠다닐 것 같은 가벼운 꿈만 꿀 것만 같았다.     


사실 어떤 꿈을 꾸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는 아니었다. 잠들기 전 우주를 생각하는 일은 무거운 현실의 짐을 떨쳐버리고 도피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광막한 시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내 존재와 내게 닥친 문제들은 작은 먼지가 될 수 있었다. 과거 내가 잘못한 일과 오늘 해결하지 못한 일과 내일의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을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에 어떤 단단한 장벽이 느껴지는데, 도저히 그런 기분으로 잠들고 싶진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생활인의 허물을 벗고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지금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는 수치인 몇몇억 광년에서 떨어진 별에서 오는 빛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아련함, 매일 우주에서 날아오는 100톤가량의 먼지와 돌덩이를 태워 없애는 지구 대기권이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쓸데없는 안도감, 늦은 퇴근길 깜깜한 하늘에 변함없이 홀로 서늘하게 빛나는 달을 보며 내가 아직도 무언가가 되지 못했다는 쓸쓸함. 이런 감정의 조각들을 긁어모아 스스로를 위한 자장가를 만들기 위해 우주라는 악보가 필요했다.     


며칠간 열심히 책을 읽어주던 남편이 어느 날, 책을 덮고 깊은 한숨을 쉬며 불쑥 이야기를 꺼낸다.

“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천문학에 한참 빠져 있었어”

책에 나온 내용에 보충 설명을 해줄 정도로 그가 이쪽 분야에 대해 해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렇게 우주에 심취하고 나니까…”

“…”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마저 말한다.

“허무에 빠졌어”

“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싶어서 파고들었는데, 그렇게 되더라고.”

그가 씁쓸하게 대답한다. 내가 묻는다.

“그래서 답을 찾았어?”

“아니.”     


이토록 간명한 대답이 마음에 울림을 남겼다. 남편이 지구 너머 우주에 빠져 절망했다면 나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소우주를 탐하다 좌절했다. 그가 필멸자로서 인간의 숙명에 대한 허무를 느꼈다면, 내 경우는 누구에게 의지하지 못한 채 단독자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남편은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인간이 의지를 갖고 살아가다 결국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한다는 점에서 과연 의지를 갖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물으며 허무에 빠져들었다면, 오직 사랑만이 구원이라 믿었던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나를 이 세상 가장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내 청춘은 열탕과 냉탕을 반복했다. 내 삶을 제물로 바칠 각오로 가장 뜨겁게 타올랐다가 사랑이 끝나가면 냉소와 경멸을 퍼부으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그래서 나는 답을 찾았을까. 아직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기에 이 답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끝내 사랑을 믿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내 안에 사랑이 남아있지 않다면 나는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놀랍게도 내가 사랑을 믿기로 한 힘은 허무 때문이었다. 허무주의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사실 누구보다 삶의 의미를 열심히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다. 나는 누구지? 왜 살지? 내 쓸모는 무엇인지? 삶의 매 순간 이런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큰 공허를 맞닥트린다. 한 발을 빠뜨린 허무의 늪을 딛고 일어날 동아줄이 필요했다.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사랑으로 돌아왔다. 사랑은 내 존재를 이대로 놓아버릴 수 없다는 본능 같았다. 간밤에 쏟은 눈물로 낮에  퉁퉁 부어오른 눈을 비비며 냉탕과 열탕 사이의 적당한 온도를 찾아갔다.  타인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해탈처럼 받아들이고, 완벽한 사랑이라는 이상을 포기했다. 내 타협안은 쉽게 말해 ‘적당하게’ 사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점점 연인과의 관계가 편안하게 바뀌었다. 이런 게 소위 닳고 닳은 어른의 성숙한 사랑법일까. 사실 그것보다 더 좋았던 건 나와의 관계가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못난 점도 많고 못하는 것도 많지만 나에게 적당하게 만족하자 스스로가 더 좋아졌다.       


그렇다고 허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일 허무의 발톱은 자란다. 손처럼 자주 눈길이 가지 않다 보니 어느새 길게 자란 발톱을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어쩌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발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모습처럼 허리를 웅크리고 턱을 괴고 앉아 내 발톱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필멸자이자 단독자인 인간은 허무를 응시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허무하게’ 받아들인다. 발톱을 자르고 다시 허리를 펴며 존재를 일으켜 세운다. 잘라낸 부스러기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거울 앞에서 공들여 손을 씻는다. 비누 거품 같은 찰나의 인생일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살아간다고 다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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