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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un 24. 2024

비행기 모드 on&off

짧은 소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B섬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그녀는 창가 좌석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흐린 날이었다. 구름이 뒤덮은 하늘이 온통 하얬다. 하얀빛은 하늘을 완전히 점령했다. 흰빛에 홀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이면서 갑자기 파란 하늘이 나타났고, 동시에 그녀의 한쪽 눈이 컴컴해지고 말았다.


이번에 또? 몸의 통증에 예민한 그녀는 이런 이상 반응이 일어났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몇 달 전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봤을 때였다. 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그 일을 떠올린다. 제임스 터렐은 빛의 예술가였다. 인간이 자연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빛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걸로 유명했다. 그녀는 온통 흰빛으로 둘러싸인 설치 작품 안으로 들어갔다. 곡선으로 섬세하게 설계된 공간은 그림자조차 없어 바닥과 벽을 구분할 수 없었다. 완전한 무無의 공간이었다. 그곳이 성스러운 천국처럼 느껴졌다가 새하얀 공포가 가득한 지옥처럼 느껴졌다. 물리적 실체를 잃은 공간을 넘어질 듯 조심스럽게 걷다가 문득,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 그러니까 작품에서 나와 세속의 빛이 눈에 닿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경험이 기묘해서 일부러 작품명을 찾아봤다. 간츠펠트 Ganzfeld. 독일어로 전체 시야,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시각적 자극을 박탈당했을 때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환각으로 심인성 시각 상실이 있었던 걸까. 완전한 무상 속에서 뇌가 한쪽 눈에 어둠을 내렸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인데,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흰빛의 저주일까. 조심스럽게 눈 주위를 마사지하곤 다시 눈을 떴봤지만 여전히 어둠이다.


 


이번 여행은 좀 충동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 모드가 절실해서 떠났다. 지상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도망쳤다. B섬은 친구 J가 오래 전 살았던 곳이라 마음이 갔다. 단순히 비행기 모드가 필요했다면 방구석에 숨어서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꿔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연결이 끊어지는 물리적 상태를 체감하고 싶었다. 30대가 되고, 전에 다니던 직장을 떠나 처음으로 이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새 직장은 녹록지 않았다. 전직장에서 늘 막내였던 그녀는 뭘 해도 똑똑한 사람이라는 대우를 받았는데, 경력직으로 들어온 직장에서는 뭘 해도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새 직장의 사람들은 모두 능력있고 그만큼 대단한 경력을 가졌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특히 이번에 새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매일 등과 어깨가 긴장해 있었고 자주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그녀가 좋아서 선택한 일인 데다가 직장동료들이 사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너무 좋은 나머지 그들과 하나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기까지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캐릭터를 떠올리며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법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들이 미워졌다. 이런 모순된 감정 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다 지쳐버리고 말았다.


 


B섬에 도착해 결국 휴대폰을 켰다.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 문제를 그냥 둘 순 없었다. J에게 전화를 건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기엔 걱정스러운데. 너 괜찮아?”

적당히 객관적이면서 다정한 J의 질문에 그만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아니, 안 괜찮아. 무서워.”

“그럼 얼른 돌아오는 비행기 찾아보자. 병원 같이 가줄게.”

“싫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에휴...”

얕은 한숨을 쉬고는 J가 말을 잇는다.

“그럼 거기서 병원 갈 거야?”

시계를 보니 이미 저녁 무렵이다.

“하지만 오늘은 병원 가기엔 너무 늦었어”

“그럼 말이야, 그 섬에 내가 잘 아는 테라피스트가 한 명 있는데, 오늘 저녁에 그분한테 한번 가볼래? 전에 거기서 살면서 요가 수련할 때 만난 선생님이거든. 이름은 사미. 널 도와줄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내일 너를 병원에 데려다 줄 수도 있겠다. ”

J는 주소 링크를 찍어주고 자기가 사미에게 미리 연락해 놓겠다고 했다.


 


시내의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간단하게 허기를 달랬다. 사미의 집은 숙소에서 멀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한 번 가보는 게 좋을까. 내일이 되도 눈이 돌아오지 않으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이렇게 체념하고 사미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탔다. 목적지 부근까지 온 기사는 그 집 앞으로 난 도로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내려줄테니 저쪽에 난 좁은 골목으로 100m 정도 걸어야 한다고 알려줬다.


뭐, 그 정도 걷는 거야.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목 앞에 선 그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인적 없는 동네의 어둠은 묵직했다. 새와 귀뚜라미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면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골목 양옆으로 담이 세워져 있어 간신히 사람 한 명이 다닐 수 있었다.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 빛이 너무 약해서 핸드폰 손전등을 켰다. 탁, 불이 들어오자 골목 옆으로 난 작은 도망이 드러났고, 길 위에 앉아있던 개구리가 놀라서 펄쩍 뛰어갔다. 목덜미에서 소름이 돋았다. 다시 택시를 불러 돌아가야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이 길만 지나면 목적지다. 여기까지 왔는데... 심호흡을 하고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겁이 나니 일단 빨리 걷는다. 여행지에서 이런 엄청난 모험이라니. 미쳤어, 진짜. 무서우니까 혼잣말이 마구 튀어 나온다. 무서워서 빨리 걸으니까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 땀이 난다. 좀 익숙해지니까 괜히 흥분되고 고양된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 길에서 온전히 혼자다. 생각해보면 비행기 안에서도 결국 사람들로 가득했으니, 이거야말로 그녀가 찾던 진정한 비행기 모드였다. 골목 끝이 보이자 너무 홀가분한 기분에 뛰기 시작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폴짝 제자리 뛰기를 하며 달리기를 멈춘다. 그 순간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별이 많았다. 앗,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시력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정갈한 올림머리를 한 사미는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은은한 조명이 도는 방갈로에 앉아 레몬그라스 향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천천히 사정을 설명한다. 사미는 참 다행이라며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잠시 말이 사라지고 둘다 조용히 차를 홀짝인다. 사미가 먼저 입을 연다.

“어깨가 많이 굳어 있는 게 보이네요. 제가 좀 풀어드릴까요?”

“늘 달고 다니는 통증인걸요.”

“여기 누워봐요.”


사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마사지한다. 방갈로에 누우니 별이 더 잘 보인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 4개를 발견한다.

“저 별들은 뭐에요?”

“남십자성이에요.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죠. 북반구에 사는 당신은 처음 보는 별일 거에요.”

얘기를 듣고 보니 별에 십자가 모양이 그려진다.

“저, 별자리를 찾아낸 건 처음이에요.”

“여기선 다양한 별자리를 볼 수 있어요. 저건 북두칠성이에요. 보여요?"


사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도 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사미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한다.

“지금 어깨가 많이 뭉쳐있는데 등과 골반도 마사지해줘야 할 거 같아요. 근육도 사실 다 연결되어 있어서 어깨만 풀어서는 소용없어요.”

사미는 그녀의 몸의 통증 부위를 찾아 손가락으로 꼭꼭 누른다. 그녀는 끄윽, 신음을 참는다.

“거기 너무 아팠어요.”

“풀어주면 괜찮아 질거에요. 우리는 통증을 피할 수 없어요. 통증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죠.”


밤이 이슥해진다. 그녀의 마음에는 아직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말이 별처럼 떠오른다.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름답지만 아플 수밖에 없구나. 내 마음은 완전히 고립된 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론 두려웠던 걸까. 왜 별자리에는 항상 슬픈 이야기가 따라붙을까. 이 순간 나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별자리로 되고 어떤 이야기로 남을까. 그녀는 이 말들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두 눈을 크게 뜨고 총총한 별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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