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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Dec 26. 2021

콩나물 국밥은 국인가 차인가

경계와 무경계의 티키타카

콩나물국밥은 국인가 차인가. 이 의문의 시작은 한 인터넷 게시물에서 비롯됐다. 식물을 물에 우리거나 끓이는 게 차라면, 발아한 대두를 끓이는 콩나물국을 차에 범주에 넣을 수 없냐는 의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커피도 볶은 커피콩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우려내 만든다. 이 게시물의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다. 모든 반론을 다 막아내는 재치 있는 대답. 콩나물 국밥은 간을 하잖아요? 일본 우메보시 차는 소금간이 되어있습니다. 콩나물 국밥에는 양념을 하잖아요. 인도 짜이도 향신료를 넣습니다. 콩나물 국밥은 건더기를 먹잖아요. 과일청 차도 종종 건더기를 먹습니다. 콩나물 국밥은 밥이 들어가잖아요. 보리차나 현미차도 곡물이 들어갑니다.(하긴 우리 보리차에 밥 말아 먹잖아요) 콩나물 국밥에는 계란을 올려 먹잖아요. 쌍화차에도 계란을 올려 먹습니다. 콩나물 국밥은 식사로 먹는 거잖아요. 애프터눈 티세트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 보리차에 밥 말아먹었던 기억이...) 콩나물 국밥은 배가 부르잖아요. 그건 대식가와 소식자의 차이죠. 어떤 대식가는 새참으로 가볍게 콩나물국을 차로 먹을 수도 있고, 소식가는 밀크티를 크게 한잔 끼니로 먹고 배부를 수 있죠.  


엉뚱하기 짝이 없고 정서적으로 절대 와닿지 않지만 논리적인 빈틈은 없다. 식물을 우려 먹는 게 차라면, 육수로 쓰는 다시마 국물은? 그런데 ‘다시마 차’라는 것도 있단다. 아아, 혼란스럽다. 이제 이 질문은 단순히 콩나물국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넘어섰다. 차와 국을 나누는 경계가 흐릿해지고 세상을 나누는 모든 경계가 흐릿해진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가 구분한 이 모든 분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건가. 갑자기 견고했던 세계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분별을 잃는 이 순간, 다행히 나는 이 물컹함을 즐기는 타입이다. 


  지금 내 앞에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있지만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은 이 아아를 커피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파인애플 피자를 단호하게 ‘불법’이라 외치며 그 피자를 보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것처럼 아아도 절대 커피로 인정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나에겐 이건 엄연히 피자고 커피인걸(심지어 맛있는걸) 하지만 입장을 바꿔 어떤 외국인이 더 맛있게 만들어 보겠다고 김치에 파인애플을 넣는 모습을 보면 머리를 쥐어 뜯으며 이렇게 외칠 거 같긴 하다. “이건 김치가 아니잖아!”    


 우리가 확고하게 그어놓은 경계는 누군가에게는 무경계일 수 있다. 그 경계가 깨지는 순간, 우리는 세계가 무너지는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 그건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지만, 결국은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 절대불변의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콩나물국밥을 모르는 누군가가 콩나물을 발견하고 물에 끓어낸 뒤 차라고 말하면서 커피의 제조법을 참고해서 차를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질책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콩나물 국밥을 소개시켜준다한들, 그에겐 콩나물 요리 레시피가 추가된 것이지 콩나물 차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경계의 흐물흐물한 상태는 잠깐 즐겨야지 계속 이 카오스에서 살 수 없는 노릇이니 나만의 기준을 세워보기로 했다. 뜨거운 액체를 한 모금 마시고 ‘크하, 시원하다’ 라는 감탄이 나오면 국이고, ‘음, 향기롭다’ 탄성이 나오면 차로 하기로 정했다. 이 경계도 또 언제 깨질지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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