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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Aug 01. 2022

비둘기 공포증 극복기

Feat.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연암 박지원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듯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비둘기>


어느 날 좁은 길에서 비둘기 한 마리와 마주쳤다. 왼쪽은 아파트로 가로막혀 있고 오른쪽은 주차된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양 옆이 막힌 길이었다. 길이 조금만 더 넓었다면 비둘기를 피해서 걸어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길을 점령했다. 여기서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나에게 날아들 것 같은데……순간 마음속에서 빨간 모자를 쓴 교관이 나타나 내 용맹함을 시험한다. 제군은 저 비둘기가 후두두두둑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본인을 향해 날아오를 때 놀라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아아!!? 엇, 갑자기 다리가 정지했다. 에라이, 그냥 피해 가자. 나는 뒤로 돌아 다른 길을 택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도망갔다. Run!!! Run!!!


원래 비둘기 공포증 같은 건 없었는데- 온몸이 터질 것처럼 신경질적인 고음을 내지르는 매미의 울음을 여름날에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에 갑작스럽게 ‘훅’하고 들어왔다. 다음 날 그 길에서 그 녀석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운명의 시험이었다. 이번엔 더 재빠르게 도망을 선택하면서 이 가혹한 시련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내가 아는 최고의 비둘기 심신미약자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비둘기>의 주인공 조나단이다. 어느 날 복도 앞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로 30년 동안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온 조나단의 하루는 완전히 붕괴된다. 그가 특히 두려워했던 것은 비둘기의 눈이었다. 털 속의 단추처럼 박혀서 아무런 생명을 느낄 수 없는 눈.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의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듯 보이는 눈. 살아 있는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죽을 만큼 놀란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더 까무러치게 놀라 죽을 뻔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바로 비둘기의 눈꺼풀이 눈을 덮어버린 순간이었다.(무섭다면서 참 천천히 자세히도 관찰했다) 눈꺼풀이라기보다 고무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씌우개처럼 보이는 것이 갑자기 눈 위아래에서 하나씩 나와서 눈을 덮어버리자 그는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고 고백한다.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읽고 비둘기와 다시 마주했을 때 조나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빌린 소설가)의 해석에 100프로 동의하고 말았다. 비둘기의 눈에는 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기엔 그건 완전한 무(無) 그 자체였다. 그 어떤 빛도 그 눈을 통과하면 빛을 잃고야 마는 암흑세계. 무정하고 무심하다. 그러니까 비둘기와 나는 눈빛을 보며 서로의 마음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아주 먼 이질감이었다. 만약 좁은 길에서 비둘기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비둘기 씨. 이른 아침부터 나오셨군요. 이 길을 제가 먼저 지나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을 수 없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대화를 할 수 없으면 행동으로라도 의사표현을 할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싶지만, 그런 상황에서 비둘기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갑자기 후드득 날아들어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것뿐이었다.  


도심 속 공간을 함께 나눠 쓰는 종족으로서 비둘기들이랑 그럭저럭 평탄하게 살아온 내 삶에 이번 사건은 갑작스러운 위기가 틀림없었다. 계속 비둘기를 피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출근길 지름길을 사수하는 문제를 넘어서 삶에 갑자기 들이닥친 공포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일단 퇴근하고 돌아와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그가 물었다.

“대체 비둘기가 왜 무서워?”

“음…그러니까 어제 처음 봤을 때는 예전에 읽은 소설 때문에 기이한 눈이 생각나서 싫었어. 그 눈은 결국 비둘기와 내가 다른 종족이고 절대 소통 불가능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 줘서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내 경우는 그 말도 안 통하는 존재가 갑자기 내 몸 쪽으로 날아드는 게 공포의 핵심인 거 같아. 그게 내 몸에 닿는다고 생각하면 막 소름이 돋아”

“하긴 비둘기 공포증 있는 사람들은 비둘기한테 있을지도 모를 각종 병원균을 두려워한다고 하더라.”

“그래?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걔가 갑자기 날아올라서 내 몸에 닿을까 봐 그게 너무 싫은 거 같아. 개미가 몸에 올라타는 거랑 비슷한 기분이야. 낯선 존재가 나를 또 다른 하나의 존재로 보지 않고 무심하게 놓인 정물처럼 생각하고 경계를 침입하는 게 싫어.

“흠...”

“더구나 걔랑 나랑 일대일인 상황인 것도 긴장돼. 그래도 동행이 있을 때는 오히려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딱 정면으로 마주 보는 순간에 더 긴장되는 거 같아.”

“근데 나 어릴 적 대구에 살 땐 박쥐가 날아다녔거든. 그게 갑자기 내 다리로 날아들어서 박쥐랑 부딪친 적이 있었어.”

“까아악!! 너무 싫어.”

비둘기는 그래도 박쥐보다 나은 건가. 나 같으면 트라우마 생겼을 법한 일인데 그는 그 일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마치 개미나 잠자리를 잡고 놀았던 어린 시절 추억처럼 이야기했다. 박쥐 정도는 부딪쳐봐야 도심에 흔한 비둘기 따위는 무섭지 않으려나.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그러고 보니 비둘기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 이건 전쟁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비둘기 공포증을 겪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특별한 해결책은 없었다. 일단 많이 마주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경험이 쌓이면 점점 나아진다는 싱거운 답변뿐이었다. 오히려 비둘기의 습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해 놓은 나무위키가 흥미로웠다. 시속 112km를 유지하며 10시간을 날아 한번에 1,000km를 날 수 있다니 과거 전서구로서의 위엄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닭둘기가 되어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가) 지능이 높아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았으며 인간의 얼굴을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 먹이를 주는 사람이 변장을 해도 알아본다고 한다. (헉, 그럼 겁에 질린 내 얼굴도 기억하는 걸까!) 비둘기 울음소리 영상도 있길래 들어봤다. 구구구구구구. 구구구구구구구. 구구구구구구구. 그 ‘구구’ 소리를 듣다가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연암 박지원. 정확히 말하면 그의 수필인 일야구도하기.  


단지 ‘구’라는 한 음절이 같아 생각났다고 하기엔 이 또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내가 운명론자인걸 알았을 것이다. 비둘기 만남부터 운명적 요소를 찾았으니 역시 해결책도 운명적으로 나와야 했던 운명이다.) 그날 밤 나는 연암의 깨달음을 다시 곱씹게 됐고 비둘기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일야구도하기’는 연암 선생이 요동 지방의 강을 하룻밤에 아홉 번 건너면서 얻은 깨달음을 담고 있다. 낮에는 그 거센 강물에 정신이 팔려 강물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는데, 밤이 되어 강물을 건너려니 강물 소리가 너무 크고 무서워서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순간 인간의 감각기관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왜곡됐는지를 깨닫는다. 강은 밤이고 낮이고 그런 소리를 내며 흘렀을 텐데, 낮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밤이 되자 들리는 그 소리가 공포의 핵심이란 걸 알아차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고, ‘떨어지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말안장에 올라 양반다리를 하고 강을 건넌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허세기가 가미되지만-그렇게 다리를 건너니 전혀 무섭지 않아 (과연 정말일까!?) ‘태연히’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는 것인데(실상은 그 말이 수영에 뛰어나서 그랬던 건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이 이야기는 공포심이라는 것은 감각기관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줬다. 다시 말해 연암 선생은 내가 감각기관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을 야무지게 꼬집어 주었던 것이다. 비둘기와 닿는 공포를 상상할 때마다 나는 감각을 실제보다 왜곡하고 있었다. 즉 나에게 달려들 비둘기를 어마어마하게 큰 새처럼 여겼던 것이다. 남편의 박쥐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꼬마 아이의 무릎에 닿은 박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를 덮칠 정도로 큰 박쥐를 상상했다. 사실 아주 작아서 아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쳐냈을 크기였는데 말이다. 그래, 나는 비둘기보다 훨씬 큰 존재였다!!(이걸 이제 깨달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감각을 왜곡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심을 찾자 공포심은 옅어졌다.  


다음 날, 나는 크고 위대한(?) 존재라는 마음가짐으로 그 길에 다시 들어섰다. 그런데 비둘기가 없었다. 어디 갔을까. 나는 이제 너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비둘기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길을 걸으면서 종종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비둘기들을 만나지만 내 운명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그 단 한 마리의 비둘기와는 독대하지 못하고 있다.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그 순간을 하루에 아홉 번 만나도 무섭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어쩌면 나는 비둘기 앞으로 직행하지 않고 돌아갈 것 같다. 아니 아니, 쫄아서 도망가는 게 아니다. (진짜 변명이 아니고)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유유히 산책하는 비둘기의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서 길을 양보한 것뿐이라고 ‘태연히’ 말할 것이다.


세번째 단락 <비둘기> 내용 설명은 소설  속 문장 차용

커버 이미지_ frimufilms - kr.freepi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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