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월)
신발을 주웠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짙은 갈색의 등산화였다. 색이 조금 바래긴 했지만, 밑창이 해지거나 끈이 뜯어지거나 한 곳 없이 튼튼한 신발이었다. 너는 왜 이런 곳에 놓여 있을까. 전봇대 아래 가지런히 놓인 등산화 옆에 나란히 섰다. 신고 벗기 번거로운 작업화 때문에 지금은 신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눈대중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발 사이즈보다 훨씬 큰 신발이었다. 멀쩡해 보여도 내가 쓸 수 없는 것.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신발목에 손을 대었고, 순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과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이후부터 시시때때로 그를 느끼게 되었다.
되돌아보는 일은 언제 겪어도 유쾌하지 않다. 과거를 보느라 앞을 보지 못하니까, 결국엔 넘어지고 마니까. 하지만 나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리고야 만다. 거기 있는지 알기 위해,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그가 서 있는지.
어김없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공원으로 향했다. 한두 바퀴 천천히 돌고 야외운동기구 두어 개를 이용해 노동으로 지친 몸을 풀어준 뒤 다시 작업차에 오른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었다. 이제는 갈색 등산화를 신은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 아니, 휴게시간뿐만이 아니다.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줄곧 내 곁에 있다. 새벽에 집을 나서 동료와 합류한다. 도로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차에 싣는다. 기계가 돌아가며 파쇄되는 소리를 들으며 한 블록 앞으로 나아간다. 또다시 쓰레기통을 집어 들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쏟아버린다. 차의 옆 부분을 탕탕 두드리며 동료에게 신호를 보낸다. 차가 천천히 나아간다. 모든 동작을 그가 지켜본다.
“왜 여기 계세요?”
산책하다 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돌아오는 대답 또한 여전히 없었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않았어도. 모른 척 지나갈 것을 그랬다. 희끗희끗한 머리색이 보여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존댓말을 쓰고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래, 아마도. 헛것을 본다며 보약을 짓거나 병원에 갈 법도 한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신발, 거기 다시 갖다 놓을까요?”
그는 거기 가만히 있기만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할 수 없겠지. 몇 번이고 쓰레기장에 두었다가 다시 가져오길 반복한 그때 같았다. 신발은 계속 그곳에 있다. 이사를 할 때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것들을 많이 내다 버렸다. 한 짝의 신발만을 빼고. 그것은 아직도 나의 집 신발장 가장 안쪽에 있다. 되돌아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며 나는 뒤를 돌아봤다. 두고 온 것, 미련이 있는 것,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것들은 대개 뒤쪽에 있기 마련이다.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다. 종일 신고 있어 발이 퉁퉁 부었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퀴퀴한 냄새를 빨리 씻어내고 싶다. 신발장을 열어 큰 비닐봉지 하나를 꺼냈다. 대충 섬유 스프레이를 뿌리고 작업화를 담았다. 지난번에 그대로 베란다에 두었더니 냄새가 심하다며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었다. 스프레이를 다시 신발장 서랍에 넣으려는데 지난번 들고 온 등산화와 그 옆에 둔 한 개의 장화가 눈에 들어왔다.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 왜 들고 왔을까. 문을 닫은 뒤 베란다로 향했다. 신발을 담은 봉투를 내어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장화 말고 다른 걸 신겨 드리고 싶었다, 장화가 벗겨진 모습을 보고서야 그런 생각을 했다. 봄꽃이 가득 핀 산을 며칠이고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 길에서 멀쩡한 등산 스틱을 버리고 갔다고, 개똥이 묻어서 버린 모양이라며, 잘만 닦으면 새것인데,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데도 잔뜩 들뜬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어느 산을 가고 싶으신지 물어라도 볼 걸. 샴푸 거품이 물을 타고 눈에 들어왔는지 아팠다. 나는 눈을 벅벅 닦았다. 샤워를 마치고서도 오래도록 통증이 남았다.
나는 다시 신발장 앞에 섰다.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문을 열었다. 은은한 주황빛의 등이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이 둘을 버리는 날이 과연 올까. 앞에서 주저앉아 있으니 그의 기척이 다시 느껴졌다. 일하지 않는 날에 산이라도 올라가 볼까. 그러면 버릴 수 있을까.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까.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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