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오늘은 K군의 병원 진료가 있는 날입니다.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서, 2주에 한 번 받던 진료 간격을 한 달로 바꾼 지도 꽤 지났습니다. 특별한 증상은 없지만 병원은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기존의 약 용량을 조금 줄이고 계속 지켜보자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조증을 심하게 겪은 적이 두 번 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잦은 재발을 반복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대응도 잘 한 편이라 점진적으로 약을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언젠가는 약을 전혀 먹지 않아도 될 날이 왔으면 하고 바라는 K군에게 이런 말씀은 꽤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때때로 감정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고, 이런 식이라면 과연 약을 완전히 끊게 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K군은 최근에 갑자기 찾아온 경조증을 무사히 잘 넘겼고,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재발 없이 평온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전 2년여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극적인 경험을 하기 전후로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도 조금은 성장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건강한 생활 루틴을 잘 지키다 보니 삶이 너무 무료하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전에 겪었던 광기와 민폐의 시간을 떠올려 보면,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인 기분이야말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로 여기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불편한 기억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습니다. 과거의 호색한 같고, 독선적이고, 무례하고, 자만심이 넘치고, 폭력적이던 말과 행동들이 동영상처럼 지나갑니다. 마치 K군의 어두운 면을 모두 끌어내서 뭉쳐 만든 다른 누군가가 한 것 같은 행동들입니다. 꿈이라도 꾼 것이라면 좋겠지만 결코 꿈이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록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이 기억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기 때문에 좀처럼 잊히지 않습니다. 조증이 심했을 때 자신이 실수했던 사람들을 어쩌다 마주칠 때는,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들에게 했던 행동들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서 당황스럽지만, 해명하거나 사과하기도 곤란해 얼굴을 붉히며 모른 척 지나칠 때도 가끔 생깁니다.
조울증이라는 병명을 일일이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K군 자신이 조울증 당사자가 되고 보니, 사람들이 정신 질환에 대해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정 기복이 있어 보이는 지인에게 “조울증 아니야?”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조울증 환자인 K군 입장에서는 조울증을 우스갯거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합니다. 뉴스에 조울증 환자가 관련된 사건 사고가 가끔 보도되면, 사람들이 조울증에 대해 가진 편견이 더 커질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조울증을 몰랐던 과거의 자신으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조울증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 병을 공개한다는 것은 무척 난감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가족 외에 K군이 조울증 환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주치의 선생님과 지도 교수님, 그리고 조언자 친구뿐입니다. 특히 이 친구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늘 관심을 가져 주고 결정적인 도움도 여러 번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K군의 조울증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조차도 K군의 조울증에 관한 기억까지 어떻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같이 불편한 기억이 소환된 날에는 밤에 악몽을 꿀 때도 있습니다. 조울증과 관련된 무지막지한 사건들과 감정이 뒤죽박죽 된 꿈을 꾸다가 깨면, 광기에 붙잡혀 있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온 것같아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런 날에는 다시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K군처럼 조울증 환자들 중 조증 때의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이상해서,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아예 잊기를 포기하고 살아가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르기도 합니다. 기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편집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조울증 환자는 과거 조울증에 관련된 사건들에 관한 기억이 마음에 걸린 채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기억 자체를 어떻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조금 바꿔 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에서, 꿈과 조울증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인 상상력이 많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꿈과 조울증의 유사성을 비교해 봄으로써, 이 글을 읽는 조울증 당사자가 조증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면 합니다.
조울증 환자가 조증 때 하는 말과 행동은 논리나 감정의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올 때가 많습니다. 소위 말하는 최소한의 ‘자기 검열’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남들에게 잘 내보이지 않는 깊은 속마음까지 다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증이 지나고 나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괴롭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당사자 본인이 했다고 잘 믿기지 않는 일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조증을 겪던 당시와 그것을 떠올리는 현재의 감정이 너무 달라서 엄청나게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측면 때문에 당사자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자기 안의 모순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로 커지면 정신적으로 고통스럽습니다. K군을 괴롭히는 조증 때의 기억들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괴로운 기억을 꿈에 비유해서 생각하면 어떨까요? 조울증 환자 입장에서 되짚어 보면, 조증때 했던 말과 생각과 행동들에 관한 기억이, 마치 불편하지만 생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누구나 남에게 말 못 할 만큼 민망한 꿈을 꾸는 일이 있는 것처럼, 조증 때 있었던 일을 지나간 나쁜 꿈처럼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부끄러운 내용의 꿈이 자꾸 생생하게 생각난다면 상당히 불편할 겁니다. 거친 비교이긴 하지만, 조울증 환자가 조증 때 경험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 이와 꽤나 비슷한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조증 때 일어났던 일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꿈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들은 단지 생각이 자꾸 나서 괴로울 뿐 아니라, 환자의 실제 삶과 인간관계 등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벌어진 조증 때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K군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잘해 나가고 있으면서도 과거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내가 나쁜 꿈을 꿨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굴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벌어졌던 일과 그로 인해 현재와 미래까지 영향을 주는 일을 단두리하며 지내려면 마음이 안정되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조울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잘 치료하고 관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올 날들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치료를 잘 받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마음의 변화를 예민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조울증 환자가 미래를 대비하는 최선일 것입니다.
뒤틀린 과거를 품고 살아가야 하는 조울증 환자의 입장에서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척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위로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꿈속 일이 다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히 막아야 합니다. 조증 상태라는 꿈은, 조울증 환자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전혀 꿈으로 여기고 넘길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했던 K군도 과거의 기억을 잘 달래 가며,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변화를 멋지게 대비해서 안정적인 상태를 잘 유지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디 그가 좋은 꿈만 꾸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