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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짝 Jun 17. 2024

자연선택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열셋


방학이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나 시작한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을 만들지 않은 K군에게 남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그동안 잘해 나가던 대로 기분 조절을 유지하겠다는 마음에,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은 당분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무리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조증으로 튀었던 경험 때문에 조심조심, 일부러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가롭게만 지내기엔 너무 심심하던 참에, 문득 자신을 뒤흔들어 놨던 조울증이라는 병 자체에 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서 조울증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심리학 또는 정신 건강과 관련되어 있는 책은 굉장히 많은 데 비해서, 조울증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고, K군은 열람실을 둘러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K군 자신의 병명을 처음 알게 되고, 주치의 선생님께서 처방해 주시는 대로 겨우 약을 먹기에도 버거웠을 때는 이 병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조울증은 이러이러한 병입니다 하고 알려주시면 그 말씀이 맞겠지, 하고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로 조울증을 대했습니다.


그랬던 K군이 자신의 병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려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조울증은 크게 조증과 우울증이라는 증상을 보이는 병이지만, 환자마다 다양한 현상과 패턴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른 조울증 환자들도 모두 K군과 같은 증상을 겪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한편으로는 조울증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이 다른 환자들의 일반적인 사례들과 겹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역시 알게 됩니다. 조울증에 관련된 책을 읽어 나가다 보니, 조울증이 복잡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병이라는 그의 막연한 짐작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하게 됩니다.


K군에게는 조울증이 유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병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걸립니다. 조울증이 유전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느냐에 대해서는 연구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유전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병이라는 결론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K군은 이런 사실에 여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처음 입원했을 때 진단을 받으면서, 가족 중에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질문을 받고 이 병이 유전이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한동안 조울증을 물려주었다며 부모님을 탓하며 원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 역시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접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미래에 이런 병을 물려줄 수도 있는 자신이 2세를 낳아도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도 쉬는 날이고 해서, 오랜만에 조언자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는 만날 때마다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습니다. 친구의 물음은 일상적인 인사이면서, 동시에 정말로 별일 없냐는 질문이라는 것을 K군도 압니다. 그래서 ‘잘 지냈지’라고 답하는 K군의 편안한 분위기를 읽어내고, 친구는 ‘다행이네’라고 대답합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K군이 요즘 책을 읽다 떠오른 의문을 던집니다.


“조울증이 환자 당사자나 주위 사람들에게 안 좋은 점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았을까?”


친구가 대답합니다.


“글쎄다. 당사자 개인에게는 안 좋은 특성이라도 큰 그림으로 보면 유리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K군이 말합니다.


“정말 그런 이로운 점도 있으면 맘이 좀 편할 텐데…….”




조울증이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다윈의 자연선택에 관한 책 <종의 기원>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생물은 심한 생존 경쟁의 압박을 받습니다. 아무 제약이 없다면 생물은 항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지만, 실제로는 자원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개체들이 사망하고 일부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 과정을 자연선택이라고 하며, 개체들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생존 경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선택’은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라 ‘자연의 선택’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살아남는 개체와 그렇지 못한 개체를 자연이 선택한다는 의미겠지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개체들이 다음 세대로 형질을 전달합니다. 즉, 자손을 남기게 되고, 새로운 세대에서 생존 경쟁은 계속됩니다. 그렇게 환경에 적응한 개체들의 형질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퍼지게 됩니다.


그런데 조울증을 가진 인간 개체들은 생존 경쟁에서 무슨 유리함이 있어서 계속 살아남았을까요?  이번 이야기에서 K군이 품었던 의문처럼, 조울증은 당사자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그가 속한 집단에게도 커다란 불이익을 주기 쉬운데, 이렇게 쓸모없어 보이는 불리한 특성이 왜 없어지지 않고 상당히 높은 비율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울증에도 장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조증 시기의 창의성, 통찰력, 그리고 빠른 판단과 행동력, 과감성 등입니다. 이는 주로 경조증에 한정된 장점이며, 이들이 잘 조율되어야 최선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증상이 심각해져 조증이 되면 생각을 하나로 모을 수 없어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망상적 사고 등으로 오류를 일으키기도 쉽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 과학자, 정치인 등이 조울증의 불리함을 극복하거나 또는 경조증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에너지를 발휘하여 큰 업적을 남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상태일 때 절묘하게 필요한 환경이나 시기가 도래한 경우, 당사자의 능력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생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 속 인물인 윈스턴 처칠 경도 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는 점은, 관련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그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발휘한 능력이 조울증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을까요?


자연선택에서 경조증을 가진 개체들에게 유리한 면이 있다는 가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양극성 우울증 역시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우울증은 일종의 회피 반응처럼 보입니다. 우울증은 한 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정 수준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에너지 소진 상태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행동은 사회적 관계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개인이 생존하는 데에는 의외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위험을 넘기고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양극성 우울증이 조증과 짝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사자에게 우울증은 무척 힘겹고 괴로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심한 조증에는 심한 우울증이 따라오는 현상을 보면, 우리 뇌는 과다한 에너지를 소모한 다음 그만큼 에너지를 절약하고 축적하는 기간을 확보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경우처럼 우울증이 조증의 짝으로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에너지 절약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우울증은 강력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조증의 장점과 우울증의 장점,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경조증과 우울증 모두 진화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어서 전해져 내려왔을 수 있다는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학문적인 근거는 희박하지만, K군 같은 조울증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조금 억지를 부렸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울증을 운이 나빠서 걸리게 된 재난 따위로 여기는 것보다는, 거기에서 뭔가 의미를 찾아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K군도 아마 지금처럼 계속 공부하다 보면 조울증에 관한 자신만의 통찰이 생기고, 이 병의 의미나 한계 등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K군도 조울증이란 병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가설을 만들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조울증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병을 관리하는 태도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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