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짝 Jun 10. 2024

양팔저울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열둘


저번 이야기 끝에서 K군이 걱정한 대로, 그의 경조증 증상은 조금씩 심해집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증상이 심해지는 속도가 더디게 일어나서, 변화의 양상이 이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경조증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K군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병식을 갖게 된 셈입니다.


K군은 일단 병원 진료를 더 자주 받을 수 있도록 예약을 변경합니다. 기존에는 한 달에 한 번 가던 것을, 두 주에 한 번으로 일정을 조정합니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께는 K군 자신의 기분 상태나 생활 패턴에 관해 자세히 설명을 드리고, 처방받은 약도 빼먹지 않고 신경 써서 잘 복용합니다. 이번에는 약을 먹는 즉시 효과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히 먹습니다.


K군은 심리 상담 센터도 다니기 시작합니다. 심리적인 문제가 조울증을 관리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담의 도움도 받아 보자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K군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자신이 정신적으로 어떤 부분이 취약한지를 깨닫고, 현재 기분 상태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K군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대비하면서도, 혼자서 모든 면을 다 방어하는 것은 것은 불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스스로 제어를 못 할 지경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면, 스스로의 병식을 지나치게 자신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삼자 입장에서 지켜봐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조언자 친구에게 도움도 요청합니다.


이처럼 안팎으로 본인의 기분 상태를 세심하게 점검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K군 스스로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쩔 때는 기분이 경조증으로 쏠리는 것 같다가도, 다른 때는 평범한 상태로 돌아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외줄 타기를 하듯 흔들리면서도,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해서 내딛습니다. 불안하지만 여러 안전장치를 해 놓은 덕에 쓰러지지 않고 위험한 시기를 지나갑니다.


그렇게 참을성을 가지고 치료를 받고, 시간이 흐르면서 K군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낍니다. 들뜬 상태를 왔다 갔다 하며 기우뚱대던 기분 변화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주변 사람들도 그가 확실히 안정되어 보인다며 안심시켜 줍니다. 그래도 한동안 K군은 완전히 마음을 놓지 않고 조심합니다.


다행히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K군은 봄학기 기말고사도 잘 마칩니다. 한동안 K군을 내내 불안하게 만든 경조증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경조증이 오히려 시험공부에 도움을 줍니다. 시험 기간 동안 집중력과 학습 효율이 올라갔는데, 가벼운 수준의 경조증이 시험 기간과 타이밍 좋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시험을 마친 K군이 캠퍼스를 빠져나옵니다. 이제 여름 방학입니다. 어쩌면 계절이 바뀐 영향도 있을지 모릅니다. 조금 들떠 있었던 K군의 기분은 천천히 안정되어 갑니다.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양팔저울에서 추를 더했다 덜었다 하며 균형을 잡아 나가는 과정은, 조울증에서 안정된 상태를 찾아가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조증 다음에 우울증이, 우울증 다음에는 또 조증이 찾아오기 쉬운 조울증의 특성은, 좌우로 흔들리는 저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흔들림이 멈추고 균형을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양팔저울의 좌우 균형을 잡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간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측정하려는 물체의 무게를 알 길이 없으니, 무거운 것부터 가벼운 것까지 무게추를 어림짐작으로 적당히 담았다가 덜어냈다가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정을 하다 보면 크게 흔들리던 저울의 팔이 점점 정밀하게 조정되며 영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균형을 맞추는 순서도 조울증 증상을 조정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조울증 환자마다 약에 대한 반응성과 부작용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환자에게 맞는 약과 용량을 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큰 범위에서 시작하여 점점 세밀하게 치료 약물의 종류와 양을 조절해 들어갑니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기에는 이렇게 약물을 조정하는 과정이 환자를 실험 대상으로 만든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을 맞추는 과정이 지난하더라도 이해하고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팔 저울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려는 핵심은 ‘균형’입니다. 그리고 조울증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균형은 조증으로도, 우울증으로도 쏠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이 조울증 당사자의 궁극적인 치료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때때로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조울증 환자는 기질적으로 남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예민한 성향이 기분의 균형을 잡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균형 잡기가 아주 까다로운 양팔저울 같습니다. 그래서 양팔저울과 마찬가지로 조울증의 치료와 관리도 균형 잡기의 ‘기술’에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간단한 요령 수준을 넘어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조증 접시에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등이 더해지면 저울은 조증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반대로 우울증 접시에 우울한 감정과 무기력이 더해지면 우울증 쪽으로 기울어지려고 합니다. 접시가 양쪽으로 천천히 움직인다면 그나마 균형을 잡기 쉽겠지만, 빠르게 흔들리면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이 상황이 실제 양팔 저울이라면 멈추고 싶은 순간 손으로 잡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조울증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대상은 조울증 환자의 삶의 균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울증이라는 양팔 저울의 균형을 맞추고 유지하는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과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K군은 할 수 있는 일들을 거의 다 했습니다. K군처럼 병원과 상담 센터를 다니는 동시에 주위 사람들을 통해 본인 상태를 체크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것은, 조울증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은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병의 특성상, 이렇게 돌다리를 두드리듯 확실하게 안전을 확인하며 지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위에서 한 비유처럼 조울증은 아주 예민한 저울 같아서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 내는 것, 어떻게든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이 병을 관리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조울증 관리의 딜레마인지도 모릅니다. 평소 조울증을 잘 관리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소홀하면 재발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분이 조증으로 튀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했고 지켜야 할 지침들을 잘 지킨 덕분에, K군은 불안정한 시기를 잘 넘겼습니다. 이번에 그가 노력해서 성취한 일은 앞으로 조울증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어 처음으로 커다란 한 걸음을 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혹시나 기분 변화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면을 신경 쓰며 지내야 하겠지만, 그것도 차츰 익숙해질 겁니다. 적어도 지금 K군의 균형 감각은 건강하고 안정되어 보입니다.

이전 13화 파도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