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최근 정신적, 신체적으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면서 K군은 이제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이번 주에도 그를 만나러 온 조언자 친구에게 자신의 상태가 좀 괜찮아 보이냐고 확인해 봅니다. 친구는 자기가 보기에도 K군이 평범했던 예전 모습으로 충분히 돌아온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에 K군은 상당히 안심을 합니다. 부모님께서도 요즘은 K군의 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조울증에 관한 이야기도 더러 하시는 편입니다. K군이 봄학기에 학교에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너무 무리가 안 된다면 학교도 다시 다니고, 사람들도 만나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료 때 의견을 물어보니 주치의 선생님도 이 정도 안정되었으면 복학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다시 다닐 생각을 하니 조금 걱정이 됩니다. 집 근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한 지 거의 서너 달이 되어가다 보니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또 예전에 했던 이상한 행동들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K군을 어떻게 볼지도 걱정입니다. 자신이 학교에 나타나면 여러 가지 뒷말들도 많을 것 같고, 교수님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그런 고민을 조언자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런 말 들어 봤지? 생각보다 남들이 내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이야. 물론 예전 일을 가지고 험담하는 녀석들도 있겠지만, 그러려니 해. 이미 지난 일인데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잖아.”
듣고 보니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 보기로 합니다.
다시 봄이 돌아왔습니다. 지난겨울 내내 우울증을 앓았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오래 고생했다 싶습니다. 복학해서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보니, 걱정했던 것처럼 K군이 벌였던 일들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만 하고 얼른 지나치는 학생들에게서는 어색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K군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합니다. 지도교수님께는 따로 조울증에 관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예전 일도 사과드렸더니, 다행히 금세 납득하시면서 앞으로 건강 관리 잘하라고 당부하십니다. K군은 학교 생활에 서서히 스며들어갔고, 이럴 수 있었던 데에는 조언자 친구가 은근히 도와준 덕분이 큰 것 같습니다.
어느새 강의를 듣고, 스터디 모임이나 시험공부 등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집니다. 집으로부터 반경 수백 미터를 벗어나지 못했던 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끔 생각날 뿐입니다. 다시 돌아온 평범한 일상과 특별하지 않은 일과의 반복은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러 고비를 겪은 K군에게는 이런 지루함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자신이 건강해진 증거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K군의 바람과 달리 안정된 시기는 생각보다 오래 계속되지 않습니다. 계절이 초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K군은 지난 경조증 때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몇 차례 조증과 우울증의 기분 변화를 겪으면서 병식이 생겼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또 평소에도 의식적으로 자신의 기분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이런 조짐들을 예민하게 알아채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K군은 보통 때보다 더 의욕이 넘치고, 말과 생각이 많아지고, 자신감이 과해지는 등, 예전에 겪었던 것과 무척 비슷한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는 일단 부모님과 조언자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자신의 상태를 잘 살펴봐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진료 때 주치의 선생님께 현재 상태를 자세히 말씀드립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기분 조절제의 양과 종류를 조정해서 새로 처방해 주시고는, 당분간 잘 관찰해 보자고 하십니다.
아마도 경조증 초기 증상이 나타나서 그렇겠지만, K군의 기분 자체는 아주 좋습니다. 우울증과는 완전히 반대라고 할 만큼 기분이 좋고, 에너지도 넘칩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을 마냥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K군은 기분이 들뜬 상태 때문에 굉장히 불안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경조증의 끝이 아주 안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K군은 악몽 같던 지난 일들이 또 반복될까 봐 걱정됩니다. 거대한 조증의 파도가 덮쳐와서 휩쓸리는 상상을 하면서, 잔뜩 긴장을 한 채 지내게 됩니다.
K군의 조울증 치료는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K군에게 또 기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울증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번에는 변화를 놓치지 않았고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조울증은 완치가 어려운 병입니다. 만약 처음 조울증이 발병했을 때를 놓치지 않고 제 때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잘 관리하면 평생 재발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고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에 속합니다. 대개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울증이 완치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물론 완치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울증이 호전되어 약을 더 이상 먹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이제 조울증에 대해 신경 끄고 생활해도 상관없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자신의 기분 변화를 체크해서(일기를 쓰거나 기분 기록 앱을 사용하는 등),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찰과 관리를 계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후가 아주 좋은 일부를 제외하고 조울증은 만성 질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단 조울증 진단을 받게 되면, 이 병과의 싸움에 있어 장기전을 각오하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울증의 기분 변화를 감정의 파도로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분이 올라가는 조증과 기분이 가라앉는 우울증을 그래프로 그려 보면 마치 물결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와 같은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에 나온 비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 바다에서의 파도는 어떻습니까? 바다에 몸을 담그고 떠 있을 때를 떠올려 봅시다. 눈으로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잘 보고 있다가 타이밍에 맞춰 반응하면 자연스럽게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파도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거나 어설프게 파도에 휩쓸리면 넘어지거나 짠 바닷물을 잔뜩 먹기도 합니다. 이런 해수욕 중에 일어나는 정도의 일은 조울증 환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겪을 수 있는 수준의 이벤트입니다. 훨씬 더 크고 강력한 기분 변화를 겪는 조울증 환자는 거대한 파도를 맞닥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거기에 휩쓸리는 사고를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도가 몸을 마음대로 휘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핑 보드에 올라서서 본격적으로 파도를 타고 넘어야 합니다.
조울증이 재발하는 것처럼,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도 그다음 파도가 따라오곤 합니다. 조증과 우울증의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오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파도는 그 크기가 작은 것들도 있고 커다란 것들도 있습니다. 파도의 주기는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습니다. 조증과 우울증을 다양한 크기와 주기를 가진 파도라고 생각하고, 조울증 환자는 서핑 보드를 타고 파도를 잘 타는 서퍼처럼 되어야 합니다. 파도타기 기술을 시간이 갈수록 더 잘 연마하지 못한다면, 실제 현실은 아주 괴롭고 엉망인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작은 물결들은 대처하기가 쉬운 편입니다. 기분이 가볍게 흔들리는 정도일 때는 단순히 약물 치료를 조정하는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다시 안정될 때까지 조심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파도의 규모가 클 때에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서핑 선수가 거대한 파도를 타고 나아가는 모습은 아주 멋있게 보이지만, 조울증 환자가 이렇게 강력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넘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심한 조증 때는 약물 치료만으로는 부족해서 입원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자살 사고가 심해졌을 때에는 입원을 강력하게 권유받기도 합니다.
커다란 기분 변동의 파도는 대처하기가 힘들고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후유증도 많이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파도가 심하지 않고 잔잔한 상태를 만드는 것, 즉 평소에 재발을 방지하는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파도에 대비해 특정 신호에 대한 나름의 규칙 같은 것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과 조울증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환자의 경우라면 자신의 상태 변화에 대해서 수시로 알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또 기분 상태가 조증이나 우울증으로 변화할 때 어떤 전조 증상이 있는지 알아 두고 서로 공유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만약 가족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쉽지 않겠지만, 환자 스스로 이런 내용을 정리해 두고 자신의 기분 상태를 잘 관찰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매일 기분을 기록하는 등 감정 일기를 쓰는 것은 자신의 내면 변화를 점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의 내면을 항상 관찰하고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를 닦는 것과 비슷하고, 그 수준이 높아질수록 대비 태세도 좋아집니다. 조울증 환자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증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면 이 병을 더욱 잘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조울증이 발병한 이상 신경 쓸 것이 많고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나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조울증이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합니다. K군도 앞으로 조울증 때문에 겪게 될 현실 때문에 종종 많이 불편하고, 때로는 화도 나고, 가끔은 슬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병을 겪으며 쌓이게 되는 경험 역시 치료 과정의 일부가 되기에, 잘 활용한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K군에게 ‘힘내라’고 응원하기보다는 ‘힘을 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긴장 때문에 잔뜩 굳은 몸에서 힘을 빼야 파도타기를 잘할 수 있듯이, 마음에서도 힘을 빼야 끊임없이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유연하게 넘을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줄이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될 K군에게, 이번에 또다시 찾아온 경조증의 파도는 그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단번에 파도타기의 고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은 파도타기가 조금 어설플지도 모르지만, 이번에 쌓게 될 경험으로 좀 더 나은 파도타기 선수가 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작게, 때로는 커다랗게 밀려오는 기분 변화의 파도를 능숙하게 타고 넘는 K군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