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짝 Jun 03. 2024

그래비티

당신의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조울증 환자의 이야기

이야기 열


K군이 혼자서 끙끙대고 있던 어느 날, 조언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옵니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K군 대신 그의 어머니께서 문을 열어 주십니다. 친구는 가족 외에 거의 유일하게 K군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K군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라는 것을 어머니께서도 잘 아시는 터라, 친구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신 후에 조금 걱정하시면서도 친구를 집에 들이십니다.


K군에게 이 친구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 않았기 때문에 꼴도 말이 아니라,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집에까지 찾아왔다는데 무조건 만남을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일단 방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마주 보고 앉은 둘은 서로 어색해 한동안 침묵이 이어집니다. K군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궁금해하면서도 먼저 묻지는 않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친구는, 드디어 말할 결심이 섰는지 한 번에 얘기합니다.


“지금 너무 힘든 상태일 것 같은데, 그렇지? 힘들어하는 거 그만하고, 얼른 병원에 가자. 혼자 가기 힘들면 나도 같이 가고.”


친구의 말에 잠시 멍해진 K군은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솔직히 지금은 병원은커녕 밖에 나가기도 힘듭니다. 당분간은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다고 말하려는데, 친구의 말이 이어집니다.


“전에 내가 조울증인 사촌이 있다고 했잖아, 그땐 얘기 안 했는데, 사실은 몇 년 전에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 너 볼 때마다 걔 생각이 자꾸 나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러니까 병원에 가자. 부탁이다.”


K군은 처음 듣는 친구의 말에 조금 놀랍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자기 마음을 친구가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친구가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꺼내며, 또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로 부탁하는데, K군도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못합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마지못해 친구의 말대로 병원에 같이 가기로 합니다.


다음날 아침, K군은 오랜만의 외출에 어쩔 수 없이 씻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밖에 나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양치를 하고 씻는 과정들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샤워 한 번 하는데도 무진 애를 써야 하는 게 한심합니다.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입을 옷을 고르는 일이 또 쉽지가 않습니다. 어찌어찌 한참을 고민해서 결국 대충 갖춰 입습니다. 남들은 매일같이 하는 이런 일상적인 일도, 꽤 오랫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지냈던 K군에게는 난이도가 훌쩍 높아져 버렸습니다. K군이 겨우 외출 준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가 찾아옵니다. 어머니께서도 함께 병원에 가기로 하십니다.


병원에는 다행히 환자가 많지 않아 주치의 선생님과 충분한 면담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와 현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띄엄띄엄하는 K군의 말을 듣는 주치의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주치의 선생님은 고생 많았다고 하시며, 앞으로 다시 차근차근 치료를 시작해 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은 새로 약을 처방해 주시고, 주의할 사항들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K군은 오랜만에 밖에 나왔기 때문에 우선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이 쓰여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진료 때문에 의사 선생님과 한참 이야기도 나눠야 했던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몇 달만의 외출로는 가장 먼 거리를 오랜 시간 동안 이동했더니, 집에 돌아왔을 때 K군은 녹초가 되어버렸습니다. 친구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고 바로 침대에 뻗어버립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는 친구에게 대신 고맙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 번은 친구에게 안부 전화가 옵니다. K군은 매번 걸려오는 친구의 전화를 귀찮아하면서도, 전과 다르게 꼬박꼬박 전화를 받습니다. 친구는 주말이면 K군을 근처 커피숍으로 일부러 불러내어 잡다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현관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던 K군도 한두 번 바깥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외출에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처음에는 끌려다니듯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지만, 친구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변화는 천천히 일어납니다. K군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도 하고 샤워도 더 자주 하게 됩니다. 운동삼아 집 근처를 산책합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 일부러 따라 나오시고, 같이 걸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약을 먹어야 하다 보니 식사도 가능하면 제시간에 하게 됩니다.


아직도 이런 일상적인 활동이 완전히 편해진 것은 아니지만, K군의 우울증은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좋아질수록 일상생활을 하는 게 편해지고, 일상생활이 수월해질수록 우울증도 조금씩 좋아집니다. K군은 이제 우울증 회복의 선순환에 들어섰습니다.




일상생활의 무게


영화 <그래비티>는 아주 잘 만든 SF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러 궤도에 올라간 우주 비행사가 겪게 되는 사건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데, 무엇보다 주인공이 경험하는 무중력 상태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영화를 보는 동안 그 감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듯합니다. 러닝타임 대부분 무중력 상태에 있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고, 아직 적응하지 못한 중력을 힘겹게 이겨내서 걸음을 떼는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그래비티(중력)>인지 납득이 갔습니다.


중력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는 등의 활동을 할 때 저항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중력은 짐이 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매우 빠르게 자전을 하고 있고, 지표면에 가만히 있는 것 같은 우리는 사실 초속 수백 미터의 속력으로 항상 지구와 같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갑자기 중력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주를 향해 튕겨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중력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는 동시에 우리를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뜬금없이 중력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K군과 같은 조울증 환자를 정상적인 삶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중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반복적인 일상생활(루틴)이라는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상생활의 ‘반복’에서 나오는 힘이 다시 그 생활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때로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벤트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정상 궤도상에 유지시키는 주된 힘은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K군이 심한 우울증 상태에 빠졌을 때, 그는 일상생활로부터 붕 뜬 것 같았습니다. 이전에는 평범하게 유지하던 일상생활의 루틴이 우울증에 빠지면서 하나 둘 사라지면서 반복적인 생활 패턴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결국 생존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고, 공중에 떠서 허우적거리듯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붙일 곳을 잃은 K군을 지상에 다시 안착시키려면 평범한 일상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공중에 뜬 K군을 지상으로 귀환시킨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K군의 조언자 친구였습니다. 다행히도 친구가 K군에게 병원에 가자고 어렵게 말한 것이 통했고, K군이 진료를 받고 약도 다시 먹기 시작한 것이 우울증에서 빠져나오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우주정거장에 있다가 지구에 귀환한 우주 비행사들이 지구 중력에 완전히 적응하는 데는 수 주가 걸린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라는 허공을 떠돌다가 지상에 발을 디딘 K군도 적응 기간이 필요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게 보이는 일상적인 기술들에 다시 적응해야 했습니다. 잠자고, 일어나고, 씻고, 밥 먹고, 운동하고,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등, 평범하고 쉬워 보이는 일들이 중력과 같이 K군을 다시 삶에 붙들어 놓습니다. 심한 조증이나 우울증 뒤엔 일정 시간의 재활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K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K군의 친구는 이 부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매일 안부 전화를 한다든지, 일주일에 한 번 근처 커피숍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나름대로 K군을 바깥세상에 다시 익숙해지라고 궁리한 방법이었습니다.


K군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일정한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조울증은 재발하기 쉬운 병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또 조울증이 변덕을 부리려고 할 때, 일상생활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재발 방지를 돕는 강력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조울증은 삶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에, 그 반대로 생활의 지나친 변화를 지양하는 것은 기분 변동을 잡아주는 무게추 역할을 합니다.


다만 때로는 지나치게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 때도 있고, 지루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일상의 무게를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활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K군 역시 일상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11화 사느냐, 죽느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