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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화 Oct 07. 2024

변화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한 때

삶,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네

몇 주를 집 주변만 맴도니 답답했다. 바람 쐴 겸 속초나 다녀오자며 길을 나섰다. 흰구름과 어우러진 파란 하늘을 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어느새 재킷을 걸칠 만큼 선선해졌다. 국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양구를 지나 인제 용대리에 오니 가을꽃 축제가 한 창이다. 구절초, 백합, 댑싸리, 버베나 등. 꽃 사이로 난 길에는 폭신 폭신한 나뭇조각이 쌓여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깊은 가을향이 올라온다. 넓지 않은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니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무심히 걷는다. 차분하고 신선한 공기가 앞머리를 살짝살짝 흔들고 지난다. 숲길을 걷는 이들의 표정이 밝다. 자연이 주는 청량함에 한껏 취한 듯하다.  


'오늘 멋지신데요. 가을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으셨네요.' 숲길을 걸으며 함께한 일행이 건넨 말에 다시 한번 돌아본다. 조금은 어색했는데 괜찮았나 보다. '어제 가을에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아내가 사줬어요. 나야 옷 고를 줄 모르잖아요. 아내 취향이에요.' 아직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 쑥스럽다.


어제 건강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중에 아내 장꾸가  '당신 가을 옷 사러 가자. 퇴직도 했는데 입을 옷이 마땅치 않잖아. 지금 가자' '응 지금... 그냥 쇼핑몰에서 사지' 의류매장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냐 매장 직원 신경 안 쓰고 직접 입어보고 살 수 있는 곳이 있어'.  굳이 긴 설명을 안 해도 내 취향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어 감사하다.


옷장을 열면 아~ 직장인이구나 하는 컬러 일색이다. 가을이 왔듯 내게 은퇴가 왔고 초록잎이 형형색색 단풍으로 변하듯 흰머리가 늘었다. 옷이 없는 게 아니라 변화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한 때다.


옷을 고르는 일은 어렵다. 오래전 가을 점퍼를 사러 갔던 때를 떠올리면 다시 힘들어진다. 이 옷 저 옷 여러 벌을 입어봐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냥 나오려는데 매장 직원은 계속 다른 옷을 권하며 입어보란다. 옷 갈아입는 부스 안에서 나는 어떤 핑계로 이 매장을 나설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핑계로 그 매장을 나섰는지 기억은 없지만 난감했던 상황은 몸이 기억한다. 그 후로 내 촌스러움을 이해한 아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사준다.


차로 5분 만에 도착했다. 아내 말대로 이 매장은 샤이한 성향의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큼 적당한 거리를 두고 편하게 내버려 둔다. 물론 아직 내가 주도적으로 옷을 고르지는 못한다. 아내가 권해주는 대로 입는 것이 편하다. 퇴직하고 처음 도전했던 노란 운동화에 무한 칭찬했던 아내가 캐주얼한 미색 목 카라 티와 도톰한 갈색 남방을 권한다. 입고 간 청바지와도 잘 어울린다. 쇼핑 스트레스가 덜하니 옷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참 어설프다. 그렇게 산 옷을 입고 오늘 나들이에 나섰는데 괜찮다니 기분이 좋다.


꽃길과 숲길을 오갈 땐 몰랐는데 주차장에 오니 공기가 차다.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의자의 히터를 누른다. 한기를 쫒는 따뜻함이 좋으니 계절의 변화는 참 오묘하다.


미시령을 넘었다. 몇 달 전 맛집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보고 네이버 지도에 맛집으로 등록했던 곳을 찾았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한 참을 기다린 뒤 점심을 먹었다. 기대와 다를 때 참 난감하다. 신뢰하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너마저...


하늘이 흐리더니 간간이 비가 온다. 우산을 쓰기엔 애매하다. 속초중앙시장에 들러 자주 가는 젓갈집에서 백명란을 샀다. 닭강정도 장바구니 안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아내가 좋아하는 미역도 샀다. 시장을 나와 울산바위가 보이는 리조트에 잠깐 들렀다. 1층에 있는 스타벅스는 속초를 올 때면 으레 들르는 방앗간이다.


리조트 1층 로비는 이제 막 도착한 투숙객들로 북적인다. 연휴를 그냥 보낼 수 없는 이들이 가방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삼삼오오 이야기 나누고 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표정에서 설렘이 느껴진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깔깔대고 있다.


입실 담당 직원 머리 위에 표시되는 번호에 모두의 눈이 가있다. 그들의 눈에서 행복한 설렘이 보인다. 입실 절차를 마치고 객실로 이동하는 가족의 발걸음이 가볍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가는 아빠엄마의 표정에서도 힘듦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 여행은 저렇게 설렘과 기대를 안고 시작하는 거지.


어스름 저녁 기운이 돈다.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른 설렘이지만 그새 집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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