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story 34.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by JJ
강에겐 도착이 없지,
흐르고 흐르는 그 길이 곧 강이니까.

2019.11.16 (09:00) Arzúa - Labacolla (18:00) (29km)


어젯밤 알베르게엔 종교적 이념에 따라온 것인지, 공동체 의식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스무 명 남짓의 학생 단체가 우글우글했다. 하루종일 걸었다면 지칠 법도 할 텐데 저 나이 때엔 역시나 체력이 닳질 않는 모양인지 밤이 새도록 활기가 가시질 않는다. 그들 중에 누군가 나서 간간히 조용히 할 것을 타일렀지만 당연히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기에 소등은 했다만 나조차도 꽤나 씩씩하고 곡절 있는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그 왕성한 혈기를 한데 묶어두기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참을 부릅뜬 눈과 마음을 달고 침대에 누워있기란 쉽지 않을 터, 얼마간 까불거리고 어딘가로 나다니는 것은 그래 좋다, 충분히 이해한다만, 문과 바투 놓인 내 침대 위로 몸과 얼굴 할 것 없이 후레시를 비춰대는 바람에 2층 침대 위에 담요를 걸어 커튼을 급조해 냈다. 인솔자가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오밤중에 어딜 그리 나다니나 싶은 게 겁도 없다. 그래, 보드라운 솜털 밑으로 양기가 잔뜩 흐를 그 젊음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나. 왁자한 밤이었지만 그들의 이모뻘쯤 되는 나는 칙칙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고 불평할 새도 없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해를 따라가세요' 표시석

꽤 깊은 잠에 들었나 보다. 8시가 넘은 시간에 겨우 뭉그적거리며 일어나니 학생들은 이미 한차례 빠져나가고 밤사이 그들의 몸을 품었던 이불들만 모양에 맞춰 구겨져있다. 아침이면 더 달아오를 기력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또 와글와글 걷고 있을지. 발갛게 상기된 볼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을 맞추고 있겠지.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나 볼걸 그랬나, 생각하며 이부자리를 정리하다 2층 침대 밑으로 담요를 덮어 막막히 가려버린 내 침대를 보고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밤 사이 건들지 말라고 성질머리 고약한 사람처럼 시위라도 하듯 해놓고 불쑥 친한 척이라니. 나였대도 그다지 달갑진 않았을 것 같다.

아기돼지 삼 형제, 둘째의 나무집과 셋째의 벽돌집.

잔잔히 온기만 남아있는 조용한 식탁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싱크대학교 설거지학과 출신 미영언니는 현금인출을 하러 외따른 방향으로 향했고 나는 표시석이 가리키는 길로 걸었다. 비가 오지 않는 하루는 귀하다. 마을을 벗어나 고즈넉한 산길에 들어서고 나서 아침안개를 마시며 걸었다. 상쾌한 공기에 하루 종일 지치지도 않고 마냥 걸을 수 있을 것만도 같았다. 두어 시간 남짓 더 걸어 점심을 먹으려 바에 들러 역시나 토스타다와 커피를 먹는데 미영언니가 왔다. 순례길이라면 스페인을 관통하는 길고 긴 길인데 그 위에서 어떻게 하면 때 되면 만나고 어딜 가든 마주치나 싶겠지만 실은 길은 좁고 하나의 길을 따라 식당과 카페들이 있기에 밥을 먹다 보면 지나치기도 하고 마주치기도 하는 것이 다반사다. '언니, 저도 어지간히 느린가 봐요. 꽤 먼저 온 것 같은데 따라 잡혔네요' 했더니 내가 뭘 그렇게 맛있게 먹나 훔쳐보려고 뛰어왔단다. 말만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똑같은 걸 주문한다. 아니 설마, 아무리 그렇대도 진짜 뛰어오진 않았겠지.

구불게 난 고즈넉한 산길을 통과했던 마을
미영언니의 가방과 멀리 가는 나

이번엔 언니가 먼저 출발하고 조금 뒤따라 나도 길에 올랐다. 산뜻한 날씨에 고즈넉한 길도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고 계이름도 정확하지 않은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급기야는 반주도 없이 노래를 열창하는 몰입과 심취의 무아지경에 이르렀는데 저 멀리 저 멀리 돌담에 앉아있는 미영언니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음량조절 따위를 했을 리 없어 거기까지 소리가 닿았나 슬쩍 눈치를 봤는데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들렸다면 이미 저기서부터 박수를 치고도 남았을 테니까. 이번엔 내가 뭐 하나 훔쳐보려 뛰어왔다고 말해야지 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니 돌담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 예뻐 앉아서 한참을 기다렸노라고 선수를 친다. 옆에 나란히 앉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한눈에 드는 경치가 청명해 동화에서나 나올 듯했다. '길 정말 예쁘죠?' 언니가 물었다. 정말 그렇네요, 하고 대답은 했지만 볕이 들어 따숩다 한들 돌로 쌓은 담이고 울퉁불퉁한 표면에 엉덩이가 배겨오기 시작한다. 언니는 그런 날더러 자기는 이럴 때를 대비해 엉덩이에 지방을 차곡차곡 모아뒀단다. 내 엉덩이도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내가 먹는 토스타다를 훔쳐보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싱크대학교 설거지학과 미영언니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지방을 방석삼아 오랫동안 돌담 위에 앉아있었고 나는 먼저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작고 푸른 숲길을 따라 29km를 걸었다.
내일 닿게 될 순례길의 도착지 Santiago

29km는 쉬지 않고 걸어야 저녁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고 11월 중순은 비수기 중에서도 한가한 시기라 간간히 있는 바나 카페도 하나 둘 문을 닫는 탓에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반강제로 부지런히 걸었다. 길에 지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걸음도 느린 데다 오늘은 늦잠까지 잤으니 다들 벌써 한참을 더 앞섰을 것이었다. 오며 만났던 누군가는 이미 산티아고에 도착했겠지. 이렇게 느린 나도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자고로 순례길이란 뭔가를 깨닫기 위해 떠나온다는데 난 여태 뭘 찾았나, 뭔가를 배우긴 했나, 쓸데없는 생각들만 잔뜩 달고 걸어온 것만 같은데 이대로 도착해 버리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야 이 겁보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멈추지 않고 걸어온 이상 내일도 올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도착하게 될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순례길을 걷던 어느 날의 길 옆에 강이 흐르면 느긋하게 따라 걸어보기도 했고 멍하니 바라보며 쉬어가던 날도 있었다. 900km 가까이를 걸어오며 강물은 동행이 되어주기도, 표시석 혹은 나침반이, 쉴만한 둑이 되어주기도 했다. 강물은 견줌도 도착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길 자체로 존재한다. 그래, 그 강처럼 걸어왔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 되었든 도착하게 될 곳이 아니라 걸어온 길 위에 있었다고. 마치 강물이 흐르듯이. 그러므로 나에게 이 방랑 혹은 방황 혹은 순례 혹은 여행 혹은 삶의 행선지는 지도상에 핀으로 콕 찍어 표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이 길 자체로 기억될 것이다. 그 속의 순간들, 땅과 하늘, 스친 바람과 풍경, 마음에 담은 사람들, 그 찰나의 순간들이 영원으로 남아 간직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착의 허울 벗은 의미는 마지막 발걸음의 행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러니 겁내지 마, 이 겁보야.

산티아고 도착 전날, 미영언니와 함께한 저녁 만찬
식전빵과 서로의 술

어지간히 겁보인 데다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어수선한데 혼자이기까지 했다면 분명 얼마간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도착할 때 즈음 뉘엿하게 저문 해를 등지고 나타나던 미영언니의 그림자가 어찌나 다행이고 고맙던지.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헤치고 빨래를 해다 널고는 함께 외식을 했다.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읽고 알 수 있게 된 스페인어(그래봤자 메뉴판에 있는 단어라곤 닭과 돼지를 구웠는지 튀겼는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를 해석해 가며 먹고 싶은 음식도 골랐다. 스페인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계란 오믈렛 하나 주문하지 못해 종업원의 눈총을 샀던 날로부터 한 달이 넘게 지났으니 장족(?)의 발전이 있을 법도 하다. 나는 맥주를, 언니는 와인을 주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잔과 접시를 비웠다.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 버섯이라 대답했더니 날더러 버섯씨라고 부르겠단다. 그러는 언니는 뭘 좋아하느냐 물으니 고구마라고 답하기에 '그럼 나도 고구마 언니라고 부를게요' 했다. 그렇게 평균나이 삼십일 세, 고구마언니와 버섯동생이 되어버렸다. 이 무슨 뿌리식물과 진균식물의 조화란말인가. '고구마 언니, 그건 그렇고 우리는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찾아올 공허함에 초조해진 내가 물었다. 언니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버섯씨, 내일 다시 물어보면 내가 말해줄게요' 역시,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Question 34.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야?

떠나오던 날, 좁은 비행기에서 일기장 페이지마다 질문을 작성해 놓던 나는 이맘즈음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적었던 것일까. 과연 산티아고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카미노에서의 순간들을 많이도 추억했다. 낮마다 함께 걷고 밤마다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공연히 메모장에 남겨둔 그들의 이름을 가만 본다. '팀, 마이크, 스티브, 실비아, 로버트, 리, 산드라, 서퍼맨, 가브리엘, 알리시아, 수빈과 소영, 파파스머프와 카를로, 영탁과 필원, 마야, 넬슨, 마르코와 히카르도, 윤영 그리고 미영언니...' 줄줄이 다 나열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채워주었다. 그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생각한다. 내 감정과 내 이야기만으로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그들의 몫이다. 그들을 통해, 정확히는 그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통해 나를 만나게 된 셈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감히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둘을 꼽을 수 있겠는가. 모두의 이름이 오래 남아 순례길에서의 추억을 묵직하게 채워주고 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