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한 하루

story 33. 넬슨 만델라와 설거지 소동

by JJ
오늘 아침에 하늘은 파랗고 해님은 빛이나
이런 날 잘못될 게 뭐가 있겠어?
- [스누피]

2019.11.15 (08:30) Palas de Rei - Arzúa (18:00) (28km)


잠에 든다, 잠에서 깬다. 다시 잠에 들고 또 깬다. 그 사이 분명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을 꿨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을 보니 기분 좋은 꿈이었을까. 눈을 뜨니 그저 몽롱하기만 하다. 허공에 대고 눈만 몇 차례 끔뻑끔뻑하다 몸을 일으켰다. 창 밖이 희붐하게 밝아왔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어제저녁 주린 배로 장바구니에 담은 요깃거리들이 아직 한가득 남아있어 요거트와 빵, 커피들을 잔뜩 차려놓고 아침을 먹으려는데 엉뚱하게도 전등이 말썽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웅성대는 소리를 엿들으니 건물 전체가 정전인가 보다. 휴대폰의 밝기를 높여 그 빛을 의지해 아침을 먹었다. 의연해졌다. 오지 않는 잠에 대하여도, 기억나지 않는 꿈에 대하여도, 켜지지 않는 전등에 대하여도.

오늘의 길, 오르내리는 언덕을 지나 Arzúa까지 28km를 걸어야 한다.

별다른 것들에 괘념치 않게 되었다 하나 그중에서도 이른 아침 나서는 길에 비가 오는 것만큼은 여전히 달가워지지 않았는데, 밤 사이 더운 곳을 찾아 널어놓아도 미처 마르지 않은 판초를 보송한 몸에 걸쳐 입고 길을 나서야 하는 것도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었고 걷다 보면 후텁하게 데워지는 몸의 열기가 그 안에 갇혀 눅눅해지는 것 때문에도 그랬다. 그렇기에 매일 아침 길을 나서기 전 미리 창 밖을 살피고 손을 내어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오늘은 기실 구름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었기에 손을 밖으로 내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판초를 접어 배낭 깊숙한 곳에 넣었다. 갈리시아 지방은 일 년 내내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인 데다가, 그에 더해 10월부터는 스페인의 우기에 들어맞으니 며칠간 줄창 내린 비로 더없이 청량한 날씨가 반갑기만 했다. 시원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자 기분 좋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Palas de Rei를 벗어나던 풍경

큰 고도를 오르내리는 언덕길은 아니었더래도 오늘의 목표는 Arzúa까지 28km를 걸어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기에 선뜻 쉬어 갈 수가 없었다. 10km 남짓 걸었을까, Leboreiro 부근에서 짧게 채비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다가 넬슨을 만났다. 캐나다에서 온 넬슨은 남자치고는 왜소한 체구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키가 160도 채 되지 않는 나와 눈높이가 맞았으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깡마른 몸에 서글서글 웃고 있는 표정이 꼭 스누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곰돌이 푸. 뭐가 됐든 그 단순한 그림체의 귀여운 무언가. 안 그래도 그의 이름으로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를 연상하고 있던 터라 뭔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긍정적인 마인드는 내 알량한 마음으로는 미처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것이었는데 그와 한두 시간 정도 같이 걸었을 뿐인데도 그의 온순한 눈동자에 길이 들여지는 듯했다. 잠깐이나마 그의 선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너른 아량을 가진 사람처럼 어색한 위선을 부렸다. 넬슨은 누가 잡아매어놓은 것 같은 입꼬리가 길게도 올라 있었다. 자신의 창조주가 준 눈으로, 창조주의 시선을 통해, 창조주가 만든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듣자 하니 그 창조주는 저 들판도 만들었고, 우리가 지나며 만나는 한그루 한그루의 모든 나무를 만들었으며, 그렇기에 저 숲도 풀도 꽃도 아름답고, 자신 앞에 서있는 나조차도 창조주가 만들었으므로 또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며 일색 세상과 나에 대한 칭찬을 쏟아냈다.

넬슨과 함께 Melide로 향하던 길, 이 사진을 찍을 때 넬슨은 옆에서 울고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공치사 세례를 받았으니 대꾸를 하긴 해야겠고 뭐라도 그와의 대화에 맥락을 맞추긴 해야겠기에 기억을 되짚어 생장에서의 첫 번째 날에 우뚝 멈춰 서서 울었다는 이야기와 길을 걸으며 간간히 울컥했던 순간들에 대하여 들려주었더니 묵묵부답으로 대답이 없다. 딴에 고민 끝에 말했는데 사람 무안하게 말도 없나, 하고 흘끗 살피니 웬걸, 넬슨이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언제부터였는지 눈시울이 붉게 번져있었다. 본의 아니게 다 큰 장정을 왈칵 울려버렸다는 사실에 지레 놀라 멀리 보이는 다리로 주제를 옮기며 사진을 찍는다고 부산을 떨었다. 초등학교 때 날 꾸준하게 놀려대던 짓궂은 남자애가 유난히 정도를 모르던 날, 그래서 있는 힘껏 정강이를 깡, 하고 걷어찼던 그날, 그 애가 울었다. 그 애는 소리를 내지도 않고 혼자 시익 시익 거리면서 닭똥같이 두꺼운 눈물을 툭툭 떨궜는데 성난 숨소리만 안 들렸다 뿐이지 넬슨의 모습이 꼭 그 남자애 같다는 생각에 당황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내가 꼭 넬슨 만델라를 울려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러 피식 웃음이 날 것도 같아 괜히 다리가 멋있네, 언제쯤 지어졌을까, 따위의 질문을 해댔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어느 사이에 그의 긍정이 옮아 붙었는지 길을 잘못 들었대도 (당분간은) 걱정이 없었다. 두어 시간을 함께 걷다가 넬슨은 15km 지점의 Melide에서 멈추었고 산티아고에서 다시 만나자 기약한 후 헤어지고 나서 다시 바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후일담으로는 아쉬운 말이지만 이후 산티아고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감자튀김과 계란, 빵, 콜라, 를 시켜 먹고는 양이 많아 미처 비우지 못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후엔 비가 왔으나 이 또한 넬슨의 영향인지 싫지만도 않았던 것이, 물기를 잔뜩 먹은 숲길의 공기가 갓피어난 물망초처럼 싱그러웠고 파랗게 우거진 나뭇잎이 하늘을 가려주는 덕에 비도 얼마간은 피할 수 있었다. 길에 지천인 알밤 중에 큰 것들을 골라 주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다고 아무 데서나 열창을 할 만큼 철이 없지는 않았고 걸음이 느린 탓에 하루의 행렬에 제일 꼬리 쪽에서 걸었던지라 사람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페인에서 나에게 밥과 김치가 되어줬던 계란프라이와 감자튀김.

라고 긍정적인 척 좀 해보려니 점점 더 많은 비가 쏟아진다. 하늘도 돕질 않으니 나는 넬슨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팔자가 아닌가 보다 싶다. 6km가 남은 시점에 젖은 몸은 천근이요 신발안엔 물이 가득 차 열 걸음씩을 채 못 옮기고 간간히 뒤집어 털어줬어야 했으나 산티아고를 코앞에 두고 차를 얻어 타는 요령을 부릴 수는 없다. 나 원, 세상이 아름답니 어쩌니 하던 얘기가 오랜 일도 아니고 불과 두어 시간 전인데 어떻게 이렇게도 까마득한지 불어 터진 발을 옮길 때마다 혀를 끌끌 찼다. 그래, 사람이 변하면 요절을 한댔다. 산길을 통해 난 개울은 그런 나를 골려대며 흘러갔다. 유유히.


흐르는 개울물의 졸졸거리는 소리에 맞춰 열심히 발을 옮기다 저 앞에 먼저 걷는 미영언니를 발견했다. 한참을 먼저 출발했는데 길을 헤매 돌아오는 바람에 만났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옆으로 달려가 주머니 군데군데마다 주워 담은 알밤을 자랑했다. '언니, 이거 봐요 어떤 건 제 엄지발가락 두 개 합쳐놓은 것보다도 커요.' 하고 저 깊숙하게 숨어있는 큰 밤을 꺼내 내보이려니 그 위에 쌓여있던 밤들이 후두둑 쏟아져 흩어져버렸다. 잠깐을 멍하니 있다 배꼽을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단지 쏟아진 알밤들 때문에, 그 알밤이 굴러가는 소리 때문에, 그 허망한 손모양 때문에. 진흙이 많이 묻지 않은 몇 개만 다시 추려 담고는 남은 10km를 함께 걸었다.

스페인에서 먹은 한국인의 두루치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알베르게 근처에서 돼지고기를 사 와 두루치기를 해 먹었다. 분명 고추장이 필요했을 터인데 어디에서 났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으나 분명 한국의 맛이었던 것은 어제 먹었던 맛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애호박과 돼지고기, 그 외에 뭘 별로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특유의 감칠맛으로 완벽한 술안주가 되어주는 탓에 역시나 맥주를 마셨다. 어떻게 안 먹을 수 있겠는가, 아니 글쎄, 사람이 변하면 요절을 한댔다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이야기를 정리하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돌잡이 때 수세미를 잡은 몸이며 두 살 남짓에 걸음마를 떼자마자 싱크대가 나의 관할이었고 집에 있는 그릇들은 다 내 베개이자 이불이었다고 말하니 아니 글쎄 본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돌잡이 때 이미 싱크대를 잡았으며 길고 긴 수련 끝에 싱크대학교 설거지학과를 졸업했단다. 이길 수가 있어야지. 누군가 솔로몬의 판결처럼 '수세미를 반으로 잘라 가지도록 하여라'라고 목소리를 깔고 호령을 놓았지만 설거지 소동 내내 비실비실 웃으며 옥신각신한 끝에 싱크대를 반씩 차지하고 서서 한 명은 거품질을 했고 한 명은 헹굼질을 했다. 완벽한 분업화로 잽싸게 설거지를 끝내고는 오는 길에 주워온 그 큰 알밤들을 구워 먹었다. 이렇게 또 그저 의연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 의연(毅然) 혹은 의연(依緣)하게, 묵묵히 하루를 버텨내며 과분히 행복한 추억을 쌓은 하루가.


Question 33. 다시 돌아오고 싶어? 다시 걷고 싶어?

물론, 당연히, 기꺼이. 끝나가는 길이 아쉽기만 하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래도 그렇게 하겠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번 순례길을 모두 무사히 잘 마치고 언젠가, 쉽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나에게 또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다. 멀고 먼 길을 걸어, 여러 밤을 지나, 가끔은 죽도록 싸우기도 하고 며칠간 길을 잃기도 하면서 종국엔 찬 바람에 거칠어진 뺨을 서로 어루만지며 밥을 지어먹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뭐가 됐든 사랑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카미노를 경험한다면 그 무엇보다 값지고 특별하지 않을까. (사실 근데 짝을 지어 함께 온 순례자들 중에선 그런 애틋? 한 관계가 여럿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아직 나의 길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무릇 혼자서 잘 해내야 누군가와도 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내일의 길도 씩씩하게 걷길,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