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과의사이자 작가인 이 두 사람은 나에게 참으로 의미 있는 인물들이다. 어쩌면 그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곤 한다. 나 자신에 대해, 솔직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행운아인지를 생각한다. 두 사람을 알게 되어 친구라 부를 수 있고... 전화해서 만나고, 마음속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것 모두가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작가의 책상>(질 크레멘츠/위즈덤하우스/p79)
<작가의 책상>이란 책에서 로버트 콜스 Robert Coles 편을 읽다가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나에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마음속으로 불러낼 수 있는 사람. 그것도 몇 명이나! 초상화는 없다. 괜찮다. 내 가슴에 있다. <작가의 책상>이 도착한 지 삼 주. 이렇게 오래 이렇게 천천히 책을 읽어본 건 처음이다. 앞으로도 이런 독서를 계속할 생각이다. 생각을 곱씹을 여유가 생기고, 운이 좋으면 본문 중 등장하는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표현대로 '매가 단 한 번의 낙하로 비둘기를 낚아채듯이' 찰나처럼 떠오르는 단상을 낚아챌 수도 있기 때문이다.
9월의 첫째 일요일이었다. 사흘 동안 연속으로 비가 내렸다. 줄기차게는 아니고 이곳 뮌헨 사람들처럼 느긋하게 오다가 그치다가 말다가 했다. 8월의 마지막 주말처럼 최고 기온이 16도에 머물렀다. 남편과 아이를 영화관에 들려보내고 영화관 야외 아이스크림 카페에 앉았는데 15분도 못 견디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든든하게 입는다고 입었는데도 추웠다. 영화관 오는 길에 젊은 독일 여자가 겨울 코트를 입고 가는 것도 보았다! 그나마 8월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심란했을 것인가.
그때도 9월이었다. 나는 상해에 살고 있았다. 자고 나면 현관 밖으로 밤새 몸을 내던진 능소화들이 대문까지 이어진 돌바닥에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라도 불면 발갛게 볼을 붉힌 꽃송이들이 또르르 구르는 모습이 고혹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상해로 올 당시 나는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 바람은 생각보다 크고 깊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나 혼자서 팔만 사천 법문을 다 팔 수는 없지 않은가. 가이드가 필요했다. 단번에 핵심에 가닿고 싶었다. 불교란 무엇인지.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그것은 또 내 삶과 어디서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목련꽃 만발하던 사월에 상해로 올 때 한국인이 많은 상해라면 불교를 공부할 기회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사 오기 직전에 내가 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국 포교당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거기서 스님을 만났다. 큰 키. 마른 몸. 기름기 없는 얼굴. 작지만 날카롭지 않은 눈매. 거칠지 않은 낯빛과 조용한 말투. 제주도 암자에서 보이차를 배우려고 잠시 중국 여행을 온 분이었다. 암자로 가기 전 화엄사에서 스님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소임을 맡았다는 말씀에 이 분이구다 싶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분이. 우여곡절 끝에 상해의 법당에서 그해 가을부터 싱가포르로 떠나오기 전까지 3년 동안 경전 공부를 했다.
다행히도 나는 스님을 대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신도분들 중에는 스님이 차갑고 냉정하고 칼 같은 성격이시라며 말도 못 붙이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쩐지 나는 스님의 한 치도 곁을 내주지 않는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다스리시는 스님의 냉엄함이 숙연하도록 좋았다. 스님을 보고 있노라면 9월의 이른 저녁에 불던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료하고 서늘하지만 차갑지는 않는. 쏴아아,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물결 소리와 파도 소리도 한 템포 늦게 연달아 뒤따라올 것 같았다. 평온과 평안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사이좋은 자매처럼 몰려오는 시각의 평화로움.내가 스님께 느낀 인상이었다.
스님께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배웠다. <유마경>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내가 싱가포르로 떠난 후였다. 6년이 지난 후 스님도 우리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다시 만나 두 달에 한 번 스님을 제주에서 서울로 모셔 유마경부터 시작했다. 만 2년 만에 유마경을 끝내고 금강경까지 한번 더 훑고 나는 다시 독일로 왔다. 지금도 생각난다. 전생처럼 다사다난했던 상해 시절. 법당 맞은편 손바닥만 한 차방 선반에 놓여있던 다구들과 보이차 꾸러미 위로 비껴들던 가을 햇살. 찻물 끓는 소리에 놀란 빛들이 후다닥 붉은 찻잔 속으로 뛰어들던 고요한 소란. 햇살의 따가움을 피해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진홍빛 차 항아리들의 풍만하고 고운 자태들.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매혹시키는 찰나의 아름다움. 그 와중에도 찻물은 증기 기관차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철 끓고 있었지.
스님에게서 배운 것? 마음.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렸다. 지금을 살되 남과 비교하지 말고. 전생도 내생도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 부처님도 말씀하지 않았나. 전생이 궁금한가? 너의 현재를 보라. 내생이 궁금한가? 너의 지금을 보라. 세월이 금방이라는 것을 오십이 되어 보니 알겠다. 전생도 내생도 없다는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살아야지. 내생이 있으면 또 어떤가. 그때 가서 최선을 다해 살면 될 것을.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