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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남자가 아내를 소개하는 법

즐거운 레아마리 집

by 뮌헨의 마리


"이 숙녀분이 제 아내입니다."




레아마리 파파인 에디를 처음 보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 숙녀분이 제 아내입니다."


자기 아내를 그렇게 격조 있고 로맨틱하게 소개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영화에서도 어느 책에서도. 서울 독일학교 유치원 학부모 모임이 있던 그날 저녁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이유다. 내가 인사를 하러 다가가자 에디는 내게 양해를 구한 후 자기 아내에게 먼저 다가가 입맞춤을 했다.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에디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그 장면 하나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독일학교 유치원 3년 동안 내가 지켜본 에디는 언제나 그 모습에서 조금도 멀리 가지 않았다.


딱 한 번 학교에서 레아마리를 픽업하러 온 에디의 붉어진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레아마리가 고집을 심하게 부린 모양이었다. 소리도 고함도 화도 내지 않았지만 에디의 얼굴만 봐도 짐작이 갔다. 당시 알리시아의 고집 역시 대단해서 나는 하루 걸러 한 번씩 얼굴만 붉으락 푸르락한 게 아니라 소리소리 지를 때였으니까. 레아마리맘 역시 성정이 부드러워서 아이를 이기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한 성격 하는 나인들 대여섯 살 아이의 고집을 당하지는 못했다.


알리시아와 레아마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어 달 차이로 유치원에 들어와 초등 1학년까지 4년을 같은 반에 있었다. 레아마리가 독일로 온 지 반년 만에 우리도 독일로 왔다.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같은 바이에른으로. 대단한 와인 애호가인 에디는 광고일을 했는데, 독일 남자 중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은 미국 회사에 다니던 노아 파파와 에디가 처음이었다. 고향 근처에 땅을 사놓고 올여름 집을 지어 집 안에 와인 저장고를 완성한 에디의 집을 보러 길을 나선 토요일 오후였다. 보기도 전에 '즐거운 레아마리네 집'일 것을 확신했다.


정원이 보이는 식탁과 에디의 와인 저장고


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레아마리네에 중차대한 일이 있었고, 거기다 여름 내내 집을 짓느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개학 직전에 갑자기 방문을 실행하게 된 건 레아마리맘의 따뜻한 초대 덕분이었다. 내 브런치 글을 통해 알리시아가 계란찜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과 남편과 내가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던 싱가포르 시절 파에야를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고 파에야를 준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런 센스쟁이가 있나.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당장 달려가겠다고 약속했다.


나무로 지은 레아마리네 집은 기품이 있었다. 뒷집에 사는 이웃이 집 앞 경관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반대해서 1년이 늦어졌지만 레아마리네 집을 보자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집 앞은 초록으로 덮인 넓은 들판이었다. 그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알프스 자락이 멀리 눈에 들어왔다. 과연 뒷집이 눈물을 머금을 만한 풍경이었다. 1층은 부엌과 와인 저장실과 식탁과 거실의 벽난로와 야외 발코니로 되어 있었다. 현관 입구는 속이 시원하도록 널찍했고, 게스트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현관 옆에 붙어 있었다. 침실과 서재방과 욕실과 아이들 방은 2층에 배치했다.


도착 후 푸른 산과 파릇파릇 올라오는 정원의 잔디를 안주 삼아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며 오후의 햇살을 즐겼다. 날씨는 생각보다 따뜻해서 알리시아는 입고 간 긴 옷 대신 레아마리의 짧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빌려 입고 레아마리와 노라와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남편과 에디가 와인 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남자들의 톡에 빠져드는 사이 나는 부엌에서 레아마리맘의 티타늄 만능 냄비와 팬으로 마법처럼 완성되는 건강한 요리 과정을 구경하랴 사진 찍으랴 레시피를 받아적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레아마리맘의 파에야는 훌륭했다.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았다. 얼마나 신선한 재료를 샀는지 홍합살은 탄력이 있었고, 새우는 고소했다. 남편과 나는 옛날 파에야의 추억은 까맣게 잊고 눈 앞의 파에야 맛에 쏙 빠져들었다. 레아마리 엄마의 말은 맞았다. 어떤 추가물도 들어가지 않고 저염, 저유, 저수, 86도 저온 기법으로 완성된 요리는 먹을 때도 재료의 각각의 맛을 음미하게 하더니 위에도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세 번을 먹었는데도 위가 더부룩하지도 과하게 부르지도 않았다.


파에야와 함께 서빙된 소금을 전혀 넣지 않은 방울토마토 절임도 환상이었다. 꼭 해 보고 싶어 레시피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방울토마토 윗부분에 십자 칼집을 넣어 20초 만에 데친 후 껍질을 벗긴다. 레몬 1개를 통째로 즙을 짜고 올리브 오일 8:식초 3의 비율에 양파, 후추, 바즐 잎을 적당히 넣는다. 소금을 안 넣은 절임은 처음이었다. 뭔가 2% 부족할 줄 알았는데, 심심한 듯 상큼하고 깔끔했다. 이럴 수가. 예상을 빗나갈 때의 묘미란 남다른 맛이었다.


냄비에 물 하나 넣지 않고 야채를 물에 씻기만 한 채 냄비에 넣어 삶아준 야채는 아삭아삭했다. 신기했다. 서울에 있을 때 특별한 냄비를 사서 요리에 취미를 가지게 된 사연과 날마다 집밥을 먹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레아마리맘의 다양한 요리는 서울에서 처음 맛본 후 독일에 와서 두 번째였다. 이렇게 건강한 요리를 매일 해 주는 아내고 엄마라면 그런 사람의 남편과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정성에 같은 여자로서도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밤늦도록 맛있게 먹고 즐겁게 마시다 돌아오는 늦은 시각에 피로한 줄도 몰랐다.

정원에서 바라보이는 전경과 이웃집 정원 울타리


레아마리맘에게 맘씨 좋은 옆집 할머니 얘기도 전해 들었다. 뮌헨에서 초등 교장을 퇴임하신 분으로 남편 분은 돌아가시고 혼자 사신다 했다.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되는 젊은 가족이 이웃으로 왔다며 무척 기뻐하시더라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시고 인텔리 시라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물어오실 수 있다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단다. 한 번은 레아마리맘이 차 초대를 하자 옆집에 오시면서 뾰족 부츠를 신고 오신 멋쟁이 할머니시란다.


우리는 가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애완견을 데리고 매일 산책한다는 앞쪽 산길 아래 너른 들판과 숲으로 산책도 가야 하고, 우리 창고에 있다가 마당이 있는 레아마리네에 선물한 트람 폴린도 새로 세팅해야 한다. 그 위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로 말이다. 그때쯤이면 뒷집 이웃들도 마음을 풀고 레아마리네와 반갑게 인사도 나누게 될 것이고, 까까머리 남자애들의 머리처럼 파르스름하게 올라오는 마당의 잔디도 제법 풍성해지겠지.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곳에서 레아마리네가 단란하게 오래오래 살게 되기를. 사시사철 레아마리를 방문하는 이 길이 눈에 훤하게 익도록 자주 오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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