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도시락에 도전하다

남편의 도시락 프로젝트

by 뮌헨의 마리


갑자기 웬 도시락인가. 생각해 보니 남편의 점심을 챙겨본 지 오래다.


윌리엄 알렉산더라는 미국인 남자가 오십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쓴 책 제목이 <이 나이에 외국어라니>. 월요일 저녁 퇴근해 온 남편이 도시락을 싸 주면 좋겠다는 말에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문장도 그 제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의 간식 도시락은 매일 싼다. 신경 쓸 것도 없이 간소하다. 샌드위치 빵 하나. 과일이나 야채 스틱. 아이가 원하면 비스킷 몇 개. 때로는 방울토마토 크기의 주먹밥이나 삶은 계란. 오늘 아침처럼 계란말이를 원할 때도 있다. 서울에서 독일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해 온 일이니 일상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남편은 다르지 않은가. 갑자기 웬 도시락인가. 생각해 보니 남편의 점심을 챙겨본 지 오래다. 점심은 먹는지, 먹는다면 무엇을 먹는지 모른다. 독일이니 자기 입맛에 맞는 걸 챙겨 먹겠거니 했다. 지난 연말에 한 번 물어보니 샌드위치로 때울 때도 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건 아침이어야지, 점심까지 샌드위치면 곤란하지 않나. 날씨마저 추운데. 따뜻한 메뉴를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몇 번 날렸다. 이후 확인해 보니 꼭꼭 챙겨 먹고 있어 마음을 놓고 있었건만. 그날 먹은 돈가스가 맛이 없었다나.


날씨가 추우니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번거롭긴 하겠다. 1인 회사라 눈치 보며 먹지 않아도 되고. 밖에서 먹는 음식이 열량이 높을 테니 당연히 다이어트엔 도움이 안 되겠지. 새해 시작부터 다이어트를 계획하는 거라면 적극 도와줘야지. 중년의 다이어트가 좀 어렵나. 저녁도 수프 하나만 먹겠다는데. 해 보지 뭐. 도시락이 별 건가. 중년이 되니 겁나는 게 없다. 좋은 일이다. 머리 쓰는 일도 뜻대로 안 되니 복잡하게 따지지 않아도 된다. 주어진 미션에만 집중. 도시락, 뭘 싸 주면 좋을까.



한국식으로 밥과 국과 반찬이란 구색은 맞추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간편한가.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신혼이라면 남편의 마음을 잡아 둘 요량으로 눈과 코와 입을 골고루 만족시킬 메뉴를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맬 만도 하겠지만 이 나이에는 그럴 일도 없다. 그나저나 뭘 싸 주나. 차가워도 괜찮단다. 이런 착한 남자 같으니라구. 샌드위치는 하나 넣어줘야겠지. 오전이나 오후 간식으로 먹게. 당장 큰 도시락 통을 찾아놓고 실습에 돌입.


미니 오이 두 개와 날씬한 당근 두 개. 빨강과 노랑의 미니 파프리카도 두 개. 방울토마토는 조금 넉넉하게. 남편은 이런 야채들을 좋아한다. 다음번엔 아삭아삭 콜라비도 좀 넣어주자. 야채는 이 정도면 되겠지? 너무 익은 바나나는 싫어하니 초록색이 살짝 남은 싱싱한 바나나 한 개와 귤이나 사과도 좀 넣어 줄까? 과일도 그 정도면 오케이. 메인은 세 가지. 계란은 삶거나 계란말이로. 파스타나 볶음밥 중 하나. 나물이나 야채 볶음 한 가지. 고기를 살짝 넣어서 볶아주면 더 좋겠지? 방과 후에 아이가 독일어를 보충하는 동안 나는 도시락을 준비하면 되겠다. 야채와 과일은 미리 씻어 두고 나머지는 재료만 준비해 놓는다. 덕분에 부지런한 아침을 열 수 있겠다.


무슨 일이든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남편의 도시락 프로젝트가 그렇다. 어제 아침 남편은 위에 쓴 대로 넣어주었더니 초딩 남자아이처럼 신나게 꽃무늬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근했다. 맛은 있었는지, 양은 충분했는지, 너무 차갑진 않았는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차근차근 보완해가면 되겠지. 오후에 남편이 톡을 보냈다. 넘 맛있었고, 고마웠다나. 이모티콘 수가 상당한 걸로 봐서 일단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오랜 시간 함께 살다 보면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사랑이라는 것. 바라는 게 도시락? 얼마든지! 그나저나 오늘 아침 뮌헨에는 눈이 이렇게나 많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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