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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Sep 09. 2019

주말 저녁 독일의 할머니와 TV 보는 즐거움

독일의 새어머니와 친구가 되는 즐거움


홈쇼핑 잡지를 넘기며 어머니가 주문하신 옷들을 구경하고, 여행에 대비 새로 구입하신 경쾌한 푸른색 여행 가방과 구월 말 떠나실 라인-마인강 크루즈 여행 일정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게 내가 독일의 새어머니와 나누고 싶던 일상이었다.



새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자연사 박물관 새시계(위) 여름 보리수와 겨울 보리수 세밀화(아래)



금요일 오후 아이와 둘이서 시어머니와 양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시어머니와는 슈탄베르크역에서 만나 아이의 새 학기 준비물을 사러 갔다. 작년에는 준비할 게 많아서 비용이 100유로를 훌쩍 넘었는데, 이번에는 계속 는 학용품이 많아서 15유로 밖에 들지 않았다. 예전처럼 조심조심 양아버지 손톱도 깎아드리고, 어머니의 발톱 위물약을 발라드리며 두런두런 지난여름 이야기를 듣도 좋았다. 두 주 전 풋케어 숍에서 발톱을 너무 짧게 깎는 바람에 한동안 고생하셨다는 이야기들었다. 아이는 그날 할아버지와 그림형제 명작 영화를 두 개나 보았다. '너희가 와서 좋구나!'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 양아버지께 다음 주에 오겠다작별 인사를 드리자 기쁨으로 얼굴이 빛났다. 어머니 정원의 장미들도 세번씩이나 피고 지고 었다.


토요일 아침에는 아이와 레겐스부르크로 새할머니를 뵈러 갔다. 피곤하다는 아이를 다독여 일찍 깨웠다. 역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선물이 딸린 어린이 잡지를 사주기로 했다. 뮌헨 중앙역에서 오전 9시 44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니 1시간 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15분. 평소보다 이른 방문이었다. 아이가 얼마나 싶으셨으면 톡을 드리자 반 시간 전부터 역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 게 할머니 마음이지. 한국에 갔을 때 우리 친정 엄마도 그러셨다.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기도 전에 언니 집으로 건너오셔서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고 또 보셨다. 할머니들 마음이 한국 다르고 독일 다르랴. 친할머니 다르고 새할머니 다르랴. 아이는 할머니께 학교 실내화와 티셔츠를 새 학기 선물로 받았다. 저녁은 어머니도 나도 좋아하는 중국 식당에서 밥을 사주셨다.



자연사 박물관을 돌아보고 새어머니와 걸어서 돌아오던 길



남편은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예정된 세미나 때문에, 시누이 바바라는 이틀 연달아 양쪽 부모님을 찾아뵙겠다는 야심 찬 계획에 질렸는지 동참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다 가는 건 무리라며 새어머니 방문을 한 주 늦추라는 바바라의 훈수는 새겨듣지 않았다. 한 주 늦게 가는 게 무슨 문제냐는 질문에도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여름 내내 기다리신 에게 또 한 주를? 기다림에 지쳐 사막처럼 말라가텐데? 궁극적으로 이것은 외로움에 관한 문제. 독일로 오는 비행기에서 영화 <메리 셸리>를 보고 나서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글을 찾아읽다가 가장 와 닿은 말도  말이었다. '그는 괴물이어서 외로웠고, 외로워서 괴물이 되었다.*' 나는 후자 쪽에 손을 다.


전에는 새어머니 댁에 아이와 둘만 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남편도 없이 어머니와 는 시간은 길고도 어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어머니도 나도 편안했다. 지금까지 어머니 때문에 내가 불편했던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데 아니었나. 나한테도 절반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가 언제 어머니를 싫어했나 싶었다. 신기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한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한 주 빨리 오길 정말 잘했다. 지난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시무서운 현기증을 느끼셨단다. 가슴이 철렁했다. 사람이 혼자 그런 일을 겪으면 얼마나 무섭. 그런데도 우리한테 연락도 안 하시고. 1주일 내내 현기증도 사라지지 않았다. 독일의 노인들은 독립적이다. 기대지 않으시니 편하기도 하지만 안됐기도 하다. 우리 새어머니처럼 기댈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엔 더더욱. 미우나 고우나 가까이에 있는 건 나. 형네는 너무 멀고, 바바라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


새어머니 댁은 토요일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자고  마음없었다. 남편이 같이 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저녁에는 뮌헨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손님방에 들어가 이러시는 게 아닌가! '너희는 소파 겸용 침대가 크니까 거기서 같이  거니?' 아이도 나도 곧바로 상황이 이해되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하루 묵을 거라생각하셨던 . 아이가 귓속말을 했다. '빨리 그런다고 해!' 아이의 반응이 고마웠다. 저 나이에 할머니의 외로움까지야 이해하겠냐마는 자고 가기를 바라시는 할머니의 마음전달되었다는 뜻이니까. 이럴 때는 나도 내가 이상하다. 원래 친정 엄마한테도 그렇게 착한 딸이 아니었는데. 확실한 건 독일 부모님들과의 사이에 불편함이 사라지니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다는 것! 에라, 모르겠다. 자고 다.



자연사 박물관의 나비 그림(위) 박제한 나비 표본들(가운데/아래)



어머니와는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토요일 오후 쇼핑센터에서는 약해지신 체력도 확인했다. 체력도 마인드도 더 이상 옛날처럼 강인한 분이 아니었다.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일요일 오전 자연사 박물관에서도 1시간 돌아본 것뿐인데 피로해하셨다. 그래도 공원을 지나 걸어서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다. 전날 밖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돌아온 토요일 저녁이 하이라이트였다. 어머니와 아이와 셋이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퀴즈 예능 프로를 보았다. 두 명씩 한 조가 된 두 개의 팀이 게임과 퀴즈를 푸는 오락 프로였다. 다 이해는 못해도 웃음을 자아내는 참가자들 덕분에 셋이 마주 보며 낄낄거리기도 여러 번이었다. '무슨 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내가 말하면 '나도 그래!' 어머니가 받으셨다. 보다가 졸다가 깨다가  11시에 자러 갔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어느 팀이 이겼는지 알려주셨다.


일요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글을 쓰다가 아침 8시 30분에 아이를 깨워 어머니가 차려놓으신 식탁에 앉았다. 아이와 재빨리 침대도 소파로 돌려놓았다. 평소 아침은 요구르트에 과일만 넣어 드시는 분이 우리를 위해 빵과 치즈와 햄과 살라미와 멜론까지 잘라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가 내려주시는 커피로 맛있는 아침을 먹었고, 패션 잡지를 넘기며 어머니가 주문하신 을 구경했다. 구월 말에 가실 여행에 대비해서 미리 챙겨놓으신 침실의 옷가지, 새로 구입하신 경쾌한 푸른색 여행 가방의 가벼움, 구월 말 떠나실 라인-마인강 크루즈 여행 일정표도 같이 살펴보았다. 이런  내가 독일의 새어머니와 나누고 싶일상이었다. 어차피 남으로 만난 사이. 며느리라는 무거운 관계는 던져버리고 독일의 새어머니와 사이좋은 친구처럼 지내. 그 첫 발을 내디딘 기분이다.





*네이버 블로그 Il mio libro님의 글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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