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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13. 2020

지금 여기에

Now and here


남편이 개를 입양할까 물었다. 나의 난감한 표정을 보더니 그게 싫으면 아이가 집을 떠날 때까지 10년은 버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여기만 보며 가라고 했다.


산책길 공원(위/가운데). 침대를 거실 난방기구 옆으로 옮겼다. 수술 이후를 위해서다. 라디에이터를 바닥에 눕혀 따뜻하게 켜놓고 그 위에 앉아 아침마다 금강경을 읽는다(아래).



남편이 문어 한 마리사 왔다. 빅투알리엔 마켓 생선 가게에서. 냉동도 아니고 실물을. 무게도 크기도 실했다. 킬로당 40유로인데 1.3킬로라 50유로를 주었다고. 독일에도 문어가 있는 줄 몰랐다. 생각해 보라. 바다가 어디 있다고. 바다가 있는 민족이 문어도 먹고 낙지도 먹고 오징어도 먹지. 그런데 난 바다가 삼면인 나라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오징어만 알지 문어낙지구분할 줄 몰랐다. 말이 되나. 그래서 아봤다. 문어 Octopus. 낙지류와 마찬가지로 4쌍 8개의 다리를 가지며 다리에는 빨판이 있다. 낙지 Octopus minor. 사진을 보니 비로소 기억이 . 문어보다 작고 날씬한 저것. 남편에게는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키는 '문어'라고 뻥쳤는데 알고 보니 '낙지'였다. 암튼 나는 문어를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면 초밥도 문어만 먹는다.


사흘 전 남편이 문어를 사 와서 부엌 야외 발코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손질하는 법도 삶는 것도 엄두가 안 나서 하루 이틀 미루다가 남편의 눈치 때문에 할 수 없이 칼을 들었다. 우리 집에  드는 칼이 없다고 남편이 중자 사이즈 칼도 사 왔다. 삶은 문어 기용. 보기엔 예리해 보이지 않는데 엄청 잘 드는 칼이었다. 이 칼을 조심하라고 남편이 몇 번이나 주의를 줬음에도! 내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함. 문어를 삶은 후 썰어야지 하고 칼을 댔는데 칼등을 댄 거라. 진짜로 모르고. 가운데 손가락 손톱 바로 위에 피났음. 저녁에 남편이 듣고는 어이를 상실. 아시잖나, 이거 실화임? 이런 표정. 남편의 허를 찌른 역대급 실수라고 기록해둔다. (이보다 더한 건 한국에서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는데 여권을 안 들고 온 걸 알게 됐을 때. 언니에게 여권 찾아 택시 타고 총알같이 와! 그날 비행기는 잘 탔다.)


문어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내장도 눈도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 대신 콜라비 몇 조각. 소주도 없고 화이트 와인도 없어서 미림 조금. 비리지 말라고 생강도 몇 조각 넣고 삶았다. 검색한 대로 끓는 물에 약불로 10분가량 삶았더니 몸통이 너무 물렁해서 5분 정도 더 삶았다. 적당한 식감. 송송 썰어 초장에 찍어먹었더니 왤케 맛있는지! 먹는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 며칠 소고기도 먹고 있다. 나의 큰언니를 자처하는 서울의 J언니가 꼭 소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서. 나는 앞으로 언니들 말이라면 무조건 듣기로 했다. 스테이크용으로 최대한 얇게 썰어달라고 주문해서 야채와 함께 볶아먹었더니 맛있었다. 수술 이후에는 고기를 안 먹을 생각이라 미리 먹어둔다는 심정으로.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소고기 야채 볶음을 했지.




이번 주에는 한국 슈퍼에도 들렀다. 문어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날 한국 슈퍼에서 산 마늘장아찌는 둘 다 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한국의 자궁암 관련 항암 수기를 읽다가 힌트를 얻었다. 한국 슈퍼에서는 한국에서 온 현미와 미역과 참기름과 들기름을 한 병씩 샀다. 간장은 깜빡했다. 간장 사러 다시 가야한다. 가는 마늘장아찌도 더 사야겠다. 먹어보니 그보다 간편하고 맛있을 수 없었다. 특히 수술 이후와 항암 치료 때 밥맛도 입맛도 잃기 쉬울 거라 니 입맛을 돋우는데 한몫하리라 기대 중이다. 시누이 바바라가  노니 Noni는 돌려주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설명도 곁들여서. 너는 건강하니 예방 차원으로 먹어주면 좋을 것 같다고. 나는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서 금지 식품이라 들었다고. 모르고 계속 먹었음 어쩔뻔했나! 알려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알로에 엑기스도 먹고 싶어 샀는데 검색해보니 출혈과다를 일으킬 수 있다 해서 냉장고 안에 모셔두었다.


며칠 전 어느 분이 보내신 귀한 대추가 도착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서 대추차를 끓이는 중이다. 온 집안에 감미로운 대추 향이 번지고 있다. 마음만으로는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다른 분이 보내신 대추와 한국의 어느 보살님이 주신 보이차도 오는 중이. 마음의 부담을 가지시라는 뜻이 아니다. 많은 분들의 알뜰하고 살뜰정성을 받고 있으니 염려 마시라고 하는 소리다.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도록 들리지 않도록, 댓글로 마음으로 많은 분들의 격려를 듣고 있다. 그래서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다. 암에게도 말해주었다. 나도 우군이 많노라고. 너희는 손님일 뿐이라고. 언젠가는 떠나는 것이 손님의 도리라고. 언젠가 떠날 길 섭섭하지 말라고 아침마다 금강경도 읽어주고 있다.


주말에는 남편에게 부탁해서 침대 하나를 거실 난방 기구 옆으로 옮겼다. 수술 이후를 고려해서다. 수술은 12월 22일로 정해졌다. 그때까지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올릴 생각이다. 남편이 뜬금없이 개 입양을 고민해 보자것은 지난 주말이었다. 개는 무슨! 고양이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남편은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다.) 그게 싫으면 아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버텨주어야 한다고 했다. 노력해보겠다고 말했다. 내 산책길도 옮겼다. 이자르 강변 숲과는 반대 방향인 언덕 위 공원과 성당으로. 그곳에서는 늦은 오후에 지는 석양을 볼 수 있다. 지대가 높아 습하지도 않다. 오전에는 언덕길을 올라 왼쪽 공원으로. 오후에는 언덕길을 올라 오른쪽 성당으로. 매일의 성지순례라 불러도 되. 오전에는 공원을 돌면서 금강경 한 구절을 읊는다. 어둑한 오후에는 성당 바깥을 돌며 남편의 말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여기만 보며 가라는 그 말. Now and here.



마늘 장아찌, 문어, 소고기 야채볶음(위) 아침식사 대용인 오트밀 요구르트(과일/견과류 포함)과 암이 싫어할 간소한 식사(아래). 더 이상 과식은 없다! 공기밥도 리필하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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