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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20. 2020

저 다리 너머에 있는 것

끝없는 산책길


장미 정원 지나 돌다리를 넘어선 적도 없었다. 그 다리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날 나는 산책의 한계를 넘어보기로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산책길 너머엔 끝없는 산책길뿐.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어제 간 이자르강 산책길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평소에는 가지 않던 길을 멀리 멀리 걸어가 보았다. 저 길이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이다.



지난 사흘 동안 오전 산책을 못해서 컨디션이 안 좋았다. 목요일 오전에는 수술 접수를 위해 병원을 다. 오전 9시 30분. 코로나로 보호자 동행이 금지라 혼자서 지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병원 접수처, 담당 방문, 수술 접수처, 비뇨기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담당의 방문으로 일정이 끝나자 오후 2시였다. 금요일 오전에는 대학 병원 암 전문의를 만났다. 남편이 상담 신청을 했다. 진료도 아니고 상담만 362유로! 실제 상담 시간은 30분이었다. 원무과 접수, 비서실 접수, 다시 원무과 비용 청구, 다시 비서실 대기. 남편이 나 대신 만나는 게 제일 좋았는데. 나는 산책을 가고 말이다. 처음엔 남편이 동행 불가였다가 나중에 전문의 허락하에 부랴부랴 남편이 상담실로 달려왔다. 토요일 오전병원에 가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다. 엄청 받음. 해도 나왔는데!


수술은 모레. 입원은 내일. 입원 기간은 1주일이다. 내게 남은 시간을 세다가 마음만 바빠졌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해는 사흘만 나왔다. 황금 같은 시간에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아무것도 못하다니. 해가 짧은 오후의 산책으로 아쉬움달래야 했다. 해가 나올 때 많이 걸어야 하는. 이런 기회가  번이나 겠는가. 해가 나온 첫날 수요일 오전에는 이자르 강 산책로를 평소보다  배나 많이 걸었다. 장미 정원을 지나 동물원 지나 그륀발트가 있는 남쪽으로. 남편과 아이와 자전거길로 달린 적은 지만 혼자서는 걸어보지 않은 길이었. 이자르강 산책로는 바로 옆의 자전거 길보다 2~3미터가 높아 걸을 때도 기분이 . 장미 정원 지나 다리넘어선 적도 없었다.  다리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날 나는 산책의 한계를 넘어보기로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산책길 너머엔 끝없는 산책길뿐.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날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다리 너머에는 무한대의 산책길이 이어졌다. 왼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오른쪽으로는 이자르강이 따라왔다. 산책길에 지나친 다리만 여섯 개였다. 장미 정원 지나 첫 번째 돌다리. 두 번째는 철교. 세 번째는 차가 다니지 않는 산책용 데크. 네 번째는 뮌헨 동물원 앞 붉은 다리. 다섯 번째는 다시 산책용 데크. 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했다. 흙길이라 걷기도 편했다.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달리며 지나쳐갔다.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때로는 나처럼 혼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산책을 하고 조깅을 한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 다리 앞에 섰다. 여섯 번째 철교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익숙한 우리 동네 이자르 강변과는 달라져 있었다. 안개가 자욱했던 어제는 그 풍경 하나 만으로도 보람이 있었다. 철교 위를 걸어서 반대편 산책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방둑 길도 있었고 백조도 보았다. 왕복 세 시간의 산책 후에는 기분 좋게 지쳤다.


수요일 오후에는 오전과 반대쪽 이자르 강 산책길을 걸었다. 장미 정원 쪽이 아닌 시내 쪽. 도이치 뮤지엄과 영국 정원 방향이었. 1시간을 걸어서 영국 정원 부근까지 갔다가 해가 지는 시각에 돌아서 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위어는 석양빛을 마주 보며 걸었다. 허공 중에 대기하던 어둠이 내 어깨에서 발밑으로, 발끝을 지나 이자르 강 수면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것도 보았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강물 위로 흔들리는 것도 보았다. 병원에서 수술 접수하고 온 날도 오후에 걸었다. 보호자 없이 무시무시한 말들을 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날처럼 장미 정원 쪽 방향으로 오래 걷다가 돌아왔다. 맑고 온화한 날씨. 늦은 오후의 산책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돌아올 때는 어둠 속을 걸어서 왔다. 비싼 상담을 받은 금요일 오후에는 많이 걸었다. 장미 정원에서 해가 드는 벤치에 앉아 햇살 샤워를 했다. 어제는 다시 기운 내어 안개낀 산책길걸었다. 어두운 산책길을 다시 걸어 돌아올 땐 안개빛이 을 밝혀주었다. (암보다 수술이  무서웠다. 수술 체질이라고 촐랑댄 걸 반성함.)




'세상은 나를 위해 순조롭게만 흘러가 주지 않는다. 순조롭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잃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헤쳐나가야 할 당연한 길이라고 받아들이고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말라.' 오래전 함께 읽고 배우던 금강경을 펼치니 해설 편에 스승의 말씀이 적혀있었다. 오늘의 나를 위해 미리 써놓으신 글귀 같았다.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어떤 일이 닥쳐도 희망을 잃거나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며칠 동안 가라앉았마음에도 시들어가 용기에도 기운을 실어주는 말씀이었다. 금강경의 몇 구절에몸과 마음을 기댔다. '범부 중생이란 것도 본래 없는데 그들이 받을 고통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느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겨났다 없어지며 일정 기간 잠시 존재하는 것들로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다.'


요즘 서울의 언니가 보내준 미니 전기 매트를 침대에 깔고 누웠더니 등과 엉덩이가 따뜻해서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좋다. 형부가 보내준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볍고 따뜻한 패딩도 산책길에 최고의 선물이다. 언니가 보낸 솜바지도 열 일 하는 중. 지금 상태가 가장 편안해서 수술마저 미루고 이렇게 걷는 일상만 계속하고 싶을 정도다. 언제부터인가 피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암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나의 의사샘이 말했다. 어떻게 들으면 고약하고 냉정한 소리인데 같은 말도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인가 보다. 우리 의사샘이 다정하게 하면 하나도 밉지가 않다. 같이 웃고 말았다. 수술은 두 명의 의사가 담당한다. Prof. Scholz와 Dr. Wilkening. 앞의 분은 우리 병원 산부인과 최고 권위자시고 두 번째 분이 내 담당샘이다. 담당샘의 나이는 40대 초반쯤. 문제 학생이 아무리 사고를 쳐도 화를 안 낼 것 같은 선생님 같다. 이런 의사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비싼 상담료를 지불한 뮌헨대학 병원 산부인과 권위자인 전문의와의 만남도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라고 남편이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는 자궁 육종암이라는 희귀병으로 진단을 했다.  진단서를 보더니 대학병원 전문의는 최근 2~3년 사이에 조금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경우는 조금 세분화되어 육종보다는 암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름에는 암종+육종이 같이 붙었건만. 다시 말해서 암종과 육종 사이지만 육종보다는 암종에 더 가깝다고. 조금 애매한 해석임에도 남편의 표정은 밝았다. 그 미세한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이 그렇다니 나도 믿기로 했다. 꿈보다 해몽 아닌가. 좋은 것을 안 믿을 이유는 없다. 대학병원 전문의는 수술이 최선이며, 항암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후부터는 다른 전문의 소견 말고 우리 병원 샘들과 상의해서 진행할 생각이다.


어젯밤에는 나의 양시아버지인 오토 아버지의 친딸 미하엘라가 전화를 했다. 밤 10시였다. 나와 동갑인 미하엘라는 산부인과 의사다. 매사 따지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내가 대화를 꺼리는 인물 중 하나다. 왜 전화를 안 하나 했다. 평소엔 친하지도 않은데 이럴 땐 꼭 훈수를 두어야 속이 시원하겠지. 자기가 산부인과 의사인데 상담도 안 하니 무시당한다는 생각들었을 것이다. 그럼 뭐하나. 카타리나 어머니처럼 왜 그동안 산부인과 한번 안 갔어!로 시작하는 말을 내가 왜 또 들어주어야 한단 말인가. 왓쯔앱과 폰으로 두 번이나 전화하는 걸 안 받고 남편을 불렀다. 난 얘랑 통화하기 싫으니까 자기가 통화해. 오늘 아침에 물으니 별소리 없었고 안부만 전하더라고. 왜 산부인과 한번 안 갔냐는 소리를 마지막에 덧붙이긴 하더라고.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사람은 안 보는 게 답이다. 그 사이 멀리서 대추도 한번 더 오고, 매일 톡으로 긴 응원을 보내주고, 축원을 올리고 기도를 해주고, 명상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긴 댓글과 말없는 응원을 보내시는 구독자분들도 계시다. 고맙고 감사하고 든든하다. 건강하게 돌아오겠다. 굳건히 믿고 기다려 주실 것을 나도 믿는다.



사흘 동안 해가 나왔고, 다리 밑을 지나 걸었다. 어느 날엔 해가 저물어 강물에 비친 불빛을 보았고, 안개에 쌓인 다리의 가로등도 보았다. 저 아름다운 길과 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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