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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Dec 21. 2020

얼음꽃을 피우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입원 전날 3주간의 산책을 겨울의 장미 정원에서 마무리했다. 장미꽃, 얼음꽃, 눈물꽃 3종 세트와 함께.



겨울의 장미 정원 1



수술 전 마지막 산책을 다녀왔다. 전화를 드려야 할 곳도 많고 톡을 드릴 분도 많았지만 모두 미루고 오전과 오후 산책을 택했다. 집안 일도 청소도 마른빨래를 정리하는 일도 모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안 하고 간다고 죽을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점심은 문어를 넣은 미역국에 현미밥과 마늘장아찌를 먹었다. 이 맛을 기억해야지. 퇴원해서 집에 오면 실컷 먹어야지! 병원에서는 검은 빵과 친해질 생각이다. 한국 음식을 들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 챙겨가기는 하는데 과연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장미 정원에도 들렀다. 겨울의 장미 정원에 뭐가 남아있겠나. 기대는 없었다. 흐리고 추운 날씨여서 인적도 드물었다. 내가 거기서 무얼 보았는지 짐작할 사람이나 있을까. 얼음꽃! 장미에 얼음꽃이 피어있었다. 장미 정원에서 지금까지 본 꽃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장미여, 얼음꽃이여. 마지막까지 나에게 눈물꽃을 피우게 하는구나. 3주간의 산책은 렇게 마무리되었다. 장미꽃, 얼음꽃, 눈물꽃 3종 세트와 함께.



겨울의 장미 정원 2



전날 아이는 율리아나 집으로 갔다. 온종일 놀고도 모자란 지 저녁에는 자고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의 수술을 알고 있는 율리아나 엄마 아빠의 배려임에 틀림없다. 아이 신경 쓰지 말고 산책하고 쉬라고. 율리아나 엄마 앞에서는 두 번이나 눈물을 보였다. 아마도 편해서였을 것이다. 초등 2학년 때부터 김나지움에 들어온 지금까지 같은 반에서 만 3년 넘게 알아온 사이라서. 율리아나 할머니가 구우신 크리스마스 쿠키도 보내왔다. 따뜻한 카드와 함께. 어느 날은 저녁 산책길에 태국 음식도 들고 왔다. 그땐 내가 밝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 가족이 더 알고 있다. 아이가 김나지움에 들어가 사귄 한나 가족이다. 우리 집에서도 가깝다. 한나 엄마가 어찌나 음식을 잘하는지 아이가 극찬을 했다. 피자도 직접 굽고 크리스마스 쿠키도 같이 만들었다나. 넘넘넘 맛있었다고. 얼마나 맛있으면 아이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까. 부럽다! 한나 집에도 율리아나 집처럼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고양이 릴리도 있다. 고양이가 얼마나 한나를 사랑했으면 한나가 친구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고 안 들어온 날 저녁 내내 한나 방과 욕실과 부엌을 돌아다니며 한나를 찾더라고. 다음날 한나가 돌아오자 그제야 삐지더라고 했다.



겨울의 장미 정원 3



현경이네도 다녀갔다. 현경이 아빠가 톡이 와서 수술 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현경이 아빠도 갑상선암 수술을 했다. 동병상련. 맥도널드에서 아이들 먹을거리와 어른들 식사용으로는 피자를 사들고 왔다. 정작 만나서는 투병 얘기보다는 삼 형제 중 장남으로 살았던 이야기. 두 남동생들과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웃음 폭탄을 선사하고 돌아갔다. 그날 나는 속도 안 좋고 컨디션이 별로였는데 실컷 웃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알리시아의 서울 독일학교 베프인 레아마리네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겠다 했다. 연말에 아이를 보내 레아마리네에서 썰매도 타고 놀게 하기로 했다. 제안을 고맙게 받았다. 레아마리 엄마 역시 한식의 대가. 알리시아는 며칠 동안 한국에 온 듯 정성 어린 밥상을 받을 것이다. 레아마리와 여동생 노라와 셋이 자매처럼 지내는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하고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그때쯤 나는 병원에서 돌아와 집에서 몸조리를 할 타이밍이라 쉴 수도 있을 것이다. 고마움의 연속이다.



겨울의 장미 정원 4



시댁의 응원도 이어졌다. 남편의 형님 크리스토프와 형수님 마리온이 왓쯔앱을 보냈다. 전화가 아니라서 오히려 고마웠다.  항상 생각하겠다. 모든 게 잘 되리라 믿는다. 행운을 빌며 우리 모두  사랑한다는 걸 기억하길. 따듯한 문장에 가슴이 찡했다. 입원 전날 저녁에 시누이 바바라도 다녀갔다. 언젠가 내가 말했던 차를 사들고 왔다. 내가 얘기를 나눌 정신이 없는 걸 보고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났다. 갈 때는 내 손을 꼭 쥐어주고 갔다.  생각하겠단 말도 고마웠다. 양쪽 시어머니와도 통화를 했는데 한국 가족들에겐 못했다. 이상하게 안되더라. 마음 약해질까 봐.


입원할 가방도 쌌고, 준비는 되었다. 아이는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엄마가 깍아주는 한국 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에게 배를 먹이고 침대까지 따라가서 안아주고 나니 자정이 되었다. 3주 동안 열심히도 걸었다.  주를  달처럼, 삼 년처럼 걸었다. 얼음꽃 한 송이 피울 정도의 노력과 정성에는 못 미친다 해도 후회도 미련도 없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입원 수속과 함께 휴식이 찾아올 것이다. 노력 그만, 휴가 시작. 뭐 그런 기분이다.  되기를 바란다.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출발이다. 가는 곳이 어딘지는 잘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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