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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an 12. 2021

붉은 비트 무스의 기억

세 가지 국 세 가지 찬



음식을 나누지 않는 사이는 친구가 아니다. 친구는커녕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음식이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아는 데는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같은 병실을 쓰던 미라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토록 환상적이던 붉은 비트 무스의 맛도!


고구마를 닮은 비트(왼쪽) 병실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비트 무스(오른쪽)!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먹은 건 흰 살 생선을 넣은 미역국이었다. 조카의 작품이었다. 음식을 잘하는 아이답게 국의 간이 딱 맞았다. 수술 전에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놓은 문어는 소화가 안 될 것 같아 꺼내지도 못했다. 두 번째로 먹은 은 닭죽. 이것도 조카의 작품이었다. 조카와 아이와 따끈하게 데워서 같이 둘러앉아 먹으니 더 맛이 있었다. 세 번째 국은 내가 만들었다. 수술 전에 사놓았던 배추가 얼지도 않고 베란다에 그대로 있었다. 아깝잖나. 배추를 보자마자 조카의 엄마인 언니가 작년에 직접 담아 보내준 된장생각났다. 국 한 냄비는 끓일 수 있을 분량 남아있었다.


큰 냄비를 꺼내고 아이에게 을 반쯤 받아 불 위에 올려 달라고 했다. 배추를 대충 씻고 밑동을 자르고 남은 된장을 다 넣었다. 양파 하나, 멸치 한 줌, 마늘 조금. 배추가 푹 익도록 불을 낮춰 조금 더 끓였다. 간은 조금 심심했다. 이런 게 된장국이지. 간간하고 짭짤하면 그게 찌개지 국인가. 된장 냄새만 맡아도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한 사흘을 된장국만 먹었다. 현미 잡곡밥은 조카가 물을 많이 잡아서 최대한 부드럽게 지어주었다. 그래도 소화가 안 되어서 매끼 한 숟갈 정도만 국에 말아서 먹고 있다. 오래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야 하는데 가끔은 그 룰을 잊을 때가 있다. 맛있는 걸 먹을 때다. 내 몸이 단숨에 명령하는 그것!


병원에서 집에 오자마자 생각난 건 야채였다. 그중에서도 시금치. 나는 시금치를 좋아한다. 시금치가 들어가지 않은 김밥은 내겐 김밥이 아니다. 시금치나물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양대 나물 중 하나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나물은 독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콩나물이다. 여기는 숙주만 판다. 숙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콩나물이 그리울 때 가끔 먹기는 하지만. 한국에 가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과 깨소금과 참기름을 잔뜩 넣은 콩나물을 매끼 먹고 싶다. 뜨끈하고 시원한 콩나물 국, 콩나물을 넣은 된장찌개, 양념간장에 비벼먹는 달디단 콩나물밥도. 독일에서 구하기 힘든 귀한 도라지나 고사리나 미나리도 아니고 사시사철 먹던 콩나물을 못 먹는다는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내게 콩나물은 향수고 고향이고 집밥엄마표 음식이한국 그 자체인데.



검은 빵과 함께 하는 아침식사.



각설하고, 그래서 시금치는 먹었냐고? 먹었다. 나는 귀찮아서 못하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사놓은 시금치를 본 조카가 시금치 잡채를 해주었다. 나는 잡채도 좋아한다. 특히 시금치를 넣은 잡채. 거기에 콩나물까지 넣으면 환상이겠지만 내겐 시금치 잡채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찌나 맛있는지 두 번이나 먹었다. 먹고 나서 위가 너무 불러서 고생은 좀 했다. 사실 시금치를 먹기 전날 진짜로 당겼던 건 상추였다. 상추쌈. 우리나라의 모둠쌈처럼 케일이나 다양한 걸 같이 먹고 싶었지만 남편이 이해할 리 만무해서 만만한 상추만 사 오라고 했다. 상추 두 통을 깨끗이 씻어서 잡곡밥과 쌈장과 같이 먹었다. 상추가 아서 밥을 두 숟갈이나 먹었다. 상추 2~3개를 겹치고 밥은 손톱만큼 놓고 쌈장을  먹었다. 얼마나 개운하고 상큼하던지! 상추 때문에 잡곡밥을 평소보다 많이 먹어 그날도 고생했다.


세 번째로 먹고 싶은 야채는 삶은 양배추. 양배추를 삶아 밥과 쌈장과 먹고 싶었다. 양배추는 양념간장도 맛있는데 병원식이 느끼했던 탓인집에 오니 된장과 쌈장이 자꾸 당긴다. 양배추 한 통은 남편에게 사 라고 했다. 저걸 적당히 찌거나 데치는 게 문제다. 오늘 조카가 온다길래 삶아달라고 했. 어제는 배추를 다 건져먹고 바닥이 보이는 심심한 된장국에 조카가 사다 놓은 버섯을 듬뿍 넣었다. 하루 두 끼, 점심과 저녁만 한식으로 먹는다. 아침은 남편과 아이와 검은 빵으로 해결. 신선한 빵은 고소하고 속이 부드러워 먹을 만하다. 소프트크림을 바르고, 버터도 조금 바르고,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먹는다. 간혹 아주 얇게 썬 살라미 한 장을 같이 먹기도 한다. 느긋한 아침은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남편이 아침마다 짜 주는 오렌지 주스나 당근주스 한 잔도.



시누이 바바라가 들고 온 음식들. 중국 대체의료센터에서 지은 파워 건강식 닭육수, 망고 무스, 비트 샐러드.



어제 점심 때는 시누이 바바라가 왔다. 정각 12시. 밥때에 누가 찾아오면 난감하다. 내가 밥을 차려줄 형편도 안 되고, 내 식사도 늦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바바라가 남편과 아이와 같이 먹을 걸 챙겨 와 주면 고마운데 그런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혼자 사는 독신이라 그런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그런 생각을 잘 못한다. 바바라의 용건은 이번에 새로 건강 요리책을 샀는데 각종 레시피에 도전해 보겠다는 거다. 그래서 나를 위해 들고 온 게 망고 무스. 망고에 스위트 사워 소스를 넣었다나. 고추도 보인다. 맛을 보니 망고의 단맛과 신맛, 매운맛이 골고루 들었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빵에 발라 먹나? 그냥 맨 입에 먹나? 설마 밥에 비벼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 고만고만한 국적 불명의 레시피가 요리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게 요리책을 보라고 건네며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내겐 망고 무스 하나로 충분했다. 어느 것도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에.


차라리 독일에 흔한 뿌리 식품인 비트 샐러드를 해 주지. 내가 말했다. 비트는 항암에도 좋다. 그 얘기를 듣고 생각한 바가 있었던지 비트 하나를 잘게 잘라 샐러드처럼 만들어 남편 편으로 보냈다. 먹을 만했다. 독일에서 먹을 만한 뿌리채소는 비트 말고는 모르겠다. 어떻게 먹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자주 먹으려 하는데 레시피 연구가 필요하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비트는 비트 무스였다. 병원에 있을 때였다. 같은 방에 있던 폴란드 여성 미라의 친구가 보내준 거였다. 나는 딱 한 스푼을 맛을 봤는데 환상적이었다. 내 환호성감동 받은 미라가 친구에게 레시피까지 물어봤다. 그런데 잊었는지 레시피를 알려주지는 않더라. 그날 저녁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미라는 그 비트 무스를 폴란드 간호사 아줌마에게 주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미라가 친했던 폴란드 간호사와 내가 친했던 폴란드 간호사는 달랐다. 당시 미라와 간호사는 폴란드 말을 했다. 간호사가 비트 무스를 손에 들고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쟤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미라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고, 간호사는 비트 무스를 들고 방을 나갔다. 울고 싶었다. 잠깐만요, 저도 좋아해요! 저한테 반만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묻지는 못했다. 밤새도록 비트 무스가 눈에 어른거렸다. 나중에 물으니 매워서 자기는 못 먹을 거 같아서 줬다고. 하나도 안 맵던데. 나는 매운 거 엄청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봤을까. 내가 그토록 열광한 걸 누구보다 알면서.


당시 나는 위가 아파서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다. 무엇을 먹어도 위가 아팠다. 그 비트 무스라면 부드러운 빵에 발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떤 수프든 새로 오면 미라에게 물었다. 먹고 싶냐고. 함께 먹자고. 미라가 말했다. 자기도 친구가 치킨 수프와 음식을 보내오면 같이 나눠먹자고. 그러나 미라는 단 한 번도 내게 권하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을 폴란드 간호사에게  주었다. 물론 내 음식이 아니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나보다 퇴원이 늦을 거라 간호사와 친하게 지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다음날 나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내 저녁 메뉴가 훨씬 맛있었다. 나는 다양하게 익힌 야채와 신선하고 향긋루꼴라가 바닥에 깔린 샐러드. 미라는 그냥 빵과 치즈와 햄. 내가 먼저 저녁을 먹기 시작했고 미라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평소라면 그녀의 메뉴를 확인하고 조금 덜어놓았을 수도 있다. 미라도 통화를 하다가 풍미가 좋았던지 엄청 기대감을 보이자신의 저녁 식사 뚜껑을 열었는데. 그리고는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침묵했다. 화가 겠지! 그날 저녁 메뉴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일부러 미라가 열광하는 초콜릿 밀크 라이스를 데워먹었다. 병실 안은 금방 초콜릿향과 밀크 라이스의 고소한 향으로 넘쳤다. 전날 아침에 나온 건데 안 먹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것이었다. 네가 원하면 언제라도 말해! 휴게실에 있는 환자용 냉장고에 넣으러 갈 때 내가 미라에게 말했다. 나는 밀크 라이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다 초콜릿까지 들어있다고 생각해보라. 나 오늘 아침 밀크 라이스 먹을 건데 너도 반 줄까? 그녀는 괜찮다고 했. 그날 아침에도 미라는 말이 었다. 아침과 점심 사이에는 상큼한 오렌지를 먹었다. 먹고 싶냐는 말은 건네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속이 후련해져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친하게 지내퇴원했.  결론은 이렇다. 음식을 나누지 않는 사이는 친구가 아니다. 친구는커녕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음식이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아는 데는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토록 환상적이던 붉은 비트 무스의 맛도!



미라가 먹고 싶어했던 내 저녁 메뉴 샐러드와 초콜렛 밀크 라이스! 샐러드에는 익힌 가지와 버섯, 밑에는 향긋한 루꼴라가 쫙 깔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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