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대현 Oct 30. 2021

데미안(헤르만 헤세)

줄거리, 명언, 해석



 고전 문학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점이 하나 있다. 고전문학에는 영적인 의미와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 문학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책의 깊이와 매력을 파악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데미안이라는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자아를 찾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기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니까
두려움 없는 강한 족속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매우 견디기 힘들었겠지.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등장부터 충격적이었다. 정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던 선과 악의 개념을 뒤흔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착한 동생 아벨과 그 아벨을 죽인 나쁜 카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움에 휩싸인다.


하지만 신은 카인에게 표적을 주어서 다른 사람들이 카인을 해치지 못하게 도와준다. 정통적인 기독교 입장에서 카인의 표적은 나쁜 것이다. 살인자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카인의 표적은 용감하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 가지는 표시라고 주장한다. 단지 겁쟁이들이 카인처럼 특별한 사람들이 두려워 카인의 표적을 나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말한다.


사실 데미안의 주장도 꽤나 일리가 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두려움이 없고 개성이 강한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데미안은 그런 것이 바로 카인의 표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람은 누구 앞에서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누군가 두렵다는 건 나를 다스리는 힘을 타인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이야.

사람은 두려워하는 대상에게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데미안은 그 지점을 정확하게 꽤 뚫고 있었다. 데미안은 신기하리만큼 다른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물론이고, 싱클레어의 약점을 잡아 싱클레어를 노예처럼 부려 먹는 크로머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데미안은 인간의 행동이 두려움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파악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두려움이 우리를 망치게 하는 거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해.
네가 진짜 사나이가 되려면 그 두려움을 벗어던져 내야 해. 알겠지?

 싱클레어가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은 크러모는 싱클레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크러모는 싱클레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약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싱클레어는 도둑질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특히 도덕적으로 엄격한 부모님에게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덕분에 크러모는 싱클레어에게 협박을 함으로써 싱클레어 인생을 잠깐이지만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가 있었다. 일차원적으로 보았을 때 크러모는 싱클레어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나쁜 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크러모가 싱클레어에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두려움에 내어줌으로써 인생의 주도권을 다른 어떤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싱클레어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크러모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두려움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에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만약 크러모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두려움에 내어준 이상 다른 형태의 크러모가 주인공의 인생에 찾아와 주인공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 소원이 정말 나 자신 안에 충만하게 스며들어 있고,
나의 모든 존재가 그것으로 가득 찰 때에만 상상하던 것을 실행할 수 있고
원하는 만큼 강하게 바랄 수도 있는 거야.

 인생의 진리가 담긴 깊이 있는 말이다. 짧은 구절이지만 데미안이 운명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 깊숙이 담겨 있다. 나와 생각이 하나가 되는 그 순간, 그 생각은 인생에서 현실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생각이 내 안에 가득 차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들어있어.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너에게는 도움이 될 거야.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모두가 한번쯤은 고민해 봤을 것이다. 데미안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이미 다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일 줄도 모르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싱클레어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현재 있던 삶이 망가져 내린다. 독실하게 기독교를 따르는 집안에서 성실하게 예배를 드리며 살아가다가 데미안을 만난 뒤 그런 삶들이 다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방탕과 쾌락을 좇으며 살아가다가 그 삶에서도 의미를 잃은 후 다시 그런 삶을 청산한다. 주인공은 더 높은 차원의 생각과 믿음을 깨우치기 이전에 기존에 있던 믿음과 생각을 먼저 모두 무너뜨려야 했다.



고독한 수행을 거듭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주인공에게 데미안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세계를 반드시 깨뜨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난 너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어, 크나우어.
사람이란 이런 경우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거든.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그러고는 네 본질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주인공은 자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크나우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의도치 않게 크나우어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준다. 그 뒤로 크나우어는 싱클레어가 구원자라도 되는 양 추종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크나우어에게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찾아내는 방법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진리를 이야기한다.



 현재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에게 인생에 답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따라 하고 본다.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면 일단 무조건 순종하고 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모든 해답은 진정한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보이는 이런 식으로 번창하는 것은 전혀 연대가 아니야.
연대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를 알게 됨으로써 새롭게 탄생되는 것인데,
한참 동안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거야.


 연대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나를 우리는 것. 하지만 데미안은 모든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자아'를 찾지 못한 사람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연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껍데기 같은 연대이다.


진정한 연대는 자신의 자아를 찾은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데미안이 결국에는 '진정한 자아'를 넘어선 '진정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서술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넘어서야 했다. 두려움, 종교, 정치사상, 성욕에 이르기 까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고독으로 인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고독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나서는 이제 자아를 발견한 사람들끼리의 연대를 향해 나아간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데미안이 전쟁 중 부상을 당해 병동에 누워있을 때 그 옆에 데미안에 누워있는 것을 알아차렸고 데미안은 그다음부터 자신을 보고 싶다면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모습은 데미안과 똑같이 변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장면이 작가가 생각하는 완전한 '연대'가 완성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데미안은 진정한 '자신'을 찾은 사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선과 악을 넘나드는 경험. 그리고 고독한 과정을 지나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고독은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자신과 같은 사람과의 연대를 갈망했다.



그 진정한 연대를 위해 택한 사람이 바로 주인공인 싱클레어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주고 싱클레어가 자아를 찾았을 때 비로소 진정한 연대, 즉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데미안은 정말 깊이 있는 책이고 삶의 지혜가 많이 담긴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내가 그렇게 좋아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각자의 운명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책에서는 악인이 되기로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런 운명이 주어졌다면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그러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사상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나 역시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쁜 일을 하도록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선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아갈 운명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악한 길로 빠지는 것은 운명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난 누가 뭐 라건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때론 누군가 난 악인이 될 운명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난 끝까지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제 마우루 지 바스콘셀루스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