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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Oct 06. 2021

#33. 내가 조연인 걸 알았다.

- 연극이 끝난 후

 

<오늘의 메뉴>

미니버거, 아이스 아메리카노


  인생의 다양한 장이 있다.

어릴 적 하기 싫은 시험이나, 떨리는 발표를 앞두고 속으로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번 연극 무대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

난 늘 하기 싫은 일이 눈앞에 오면 단순한 연극 무대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2학년 반장 선거 연설을 앞두고 그런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다. 가끔 발표를 하다 실수했거나 결과가 좋지 못할 때도 주인공은 이런 역경도 있을 수 있지. 그냥 연극의 장 중에서 한 부분일 뿐이야 그런 생각으로 내 마음을 보호했었다.


  뭔가 내가 생각한 연극의 작품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면서이다. 원했던 대기업에서 모두 거절당하고 현실에 타협하여 중소기업을 들어갈 때만 해도 내 거대한 연극 작품 중 '위기'의 한 부분일 뿐 절망하지 않았지만 그곳의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책상에 앉아 오타를 찾다 문득 내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 연극의 주인공은 내가 원했던 대기업에 지금 들어가 있고 나는 단지 조연으로 그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믹스 커피를 마시며 손으로 대충 쓴 작가의 원고를 보며 내가 주인공의 무대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한 그저 그런 장치 중에 하나는 아닐까.

처음 입사하고 첫 원고를 기획하면서 당시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시중 서점을 다니며 소위 대기업 출판사의 책을 시장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 누구도 기대하거나 시키지 않았고, 신입인지라 나에게 큰 업무를 맡길 생각도 없었지만 즐겁게 열심히 시장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월요일 회의 시간에 의견을 낸 적이 있었다.

"음. 좋긴 좋은데. 그냥 작년 꺼 그대로 쓰자. 연도랑 숫자만 안에 잘 점검해보자고."


  내 의견이 무시됐다는 실망감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발전 없는 곳에 지금 내가 있다고? 내가 결국 여기까지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 절망감이 몰려왔다.

창고에서 작년 출판물을 찾고 있는데 당시 내 사수가 눈치챘는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책 만드는 게 생각보다 별꺼없죠? 작년 원고 연도랑 사진만 바꾸면 비용이 적거든요. "

그 이후로 굳이 내 개인적인 시간을 쓰면서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고 반영되지 않을 의견도 내지 않았다. 회의 중에 오늘 점심 뭐 먹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 연극무대가 하찮다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지금쯤 대작을 만들고 나랑 비교도 안 되는 큰 무대에서 커다랗고 값비싼 무대 장치 속에서 일하고 있겠지. 그런 이상한 생각도 했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십 대를 보내고 삼십 대를 보냈다면 결국 난 불평불만 많은 조연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면서 연차가 쌓이고, 의견도 말하고, 현재 출판 유행에 대해서도 넌지시 사수에게 전하기도 하면서 나름 내 볼품없는 무대를 조금씩 꾸미기 시작했다. 조명도 하나 더 추가하고, 뒤에 배경도 늘려 보기도 하고 다른 무대 등장인물도 내 무대로 끌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 혼자 힘으로 이 무대를 대작으로 만들기는 불가능이었다. 작은 노력을 모아 조명하나 추가하고, 무대를 넓혀도 이 세계는 날 빛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물일곱에 내가 서있는 무대를 바꾸기로 마음먹고 이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무대가 대작으로 바뀐 것을 아니었다.

여전히 소규모였고, 무대 장치는 날 반짝반짝 빛나게 해 주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회가 생기면 무대를 조금씩 옮겼다. 가끔은 더 큰 무대인 줄 알았다가 막상 선택 후 그 전의 작품보다 더 소규모라 실망한 적도 있었고, 생각보다 숨겨진 장치들이 많아 내 선택을 칭찬하고 싶은 때도 있었다.

마흔을 앞두고 지금 서있는 이 무대도 대작은 아니다. 결국 나는 내가 어릴 적 생각했던 그 주인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세상 어디 화려한 무대 속에서 연극을 하고 있을 테고 나는 결국 행인 1, 행인 2 정도의 조연이라 생각한다. 내 무대 안에서 나는 겨우겨우 주인공의 자리에 서있다 처절하게 믿고 있지만 사실 빛나는 다른 세계 주인공은 존재의 자체도 모르는 조연에 지나지 않은까 그런 생각도 든다.

아직은 아이가 어리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가기 위해 부모의 보살핌과 내 시간을 기꺼이 줘야 할 때는 내 무대는 더 작아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이 들으면 결국은 타협한 거야? 그냥 인정하는 거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노력했으니 조금은 기다려 보겠다는 느긋함도 조금 생겼다. 생각해보면 갑자기 생겼다 사그라지는 유명인들도 인생의 큰 무대를 갑자기 만났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꽤 보았다. 매체에 나온다고 그 사람의 무대가 대작인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나 역시 지금까지 무대도 옮겨가며, 장치도 직접 설치하며 부단히 노력해왔으니 조금은 여기 서있는 무대에서 기다려보겠다는 것이다. 이 무대에 꽃도 심고, 조명도 더 늘리고, 등장인물도 하나씩 더 등장시키면 어느 날 많은 관객이 앉아 있겠지. 그리고 내 무대에 투자하겠다는 큰 회사도 나타나겠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에요 했던 주인공들은 아마 본인들의 무대를 대작으로 만들고자 꾸준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당신과 나의 무대가 볼품없고 하찮게 느껴질지라도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말자. 오늘은 관객이 하나도 없는 작은 무대일지라고 내가 조금씩 무대를 꾸미고, 무대를 옮겨다니는 모험도 하면서 결국 대작이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다 어느 날 연극이 끝나는 날이 온다면 당신의 연극도, 나의 연극도 끝은 해피엔딩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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