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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Sep 09. 2021

#29. 즐거운 나의 독서시간

- 나의 무대가 시시해졌다.

<오늘의 점심 메뉴>

복숭아, 바나나


  나의 무대가 시시해졌다.

시를 읽고 작가의 생애를 찾아보고. 내 삶을 대단한 문학 작품인 것처럼 이렇게 살아도 되나. 혹시 ‘오발탄’의 ‘철호’처럼 방향을 잃은 것은 아닌지. 내 삶을 대단한 연극 무대처럼 진지하게 만들고자 노력했었다.   

 

  아이를 낳고 나의 세상이 작아졌다. 

‘윤동주’, ‘버지니아 울프’는 무대에서 사라졌고 매일 저녁 ‘토순이’와 ‘달곰이’가 나의 무대로 올라왔다. 오늘은 노란 풍선이 자신의 친구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같은 모양이라고 축구공에게 친구라고 말을 걸기도 하고 같은 색이라고 바나나에게 말을 건다. 이런 시시한 이야기에 여섯 살 아이 눈은 별처럼 반짝인다. 건조하게 읽는 내 목소리에도 대작처럼 흥분하여 노란 풍선의 이야기를 함께하다 잠이 든다. 잠이 드는 순간에도 노란 풍선이 집에는 잘 도착했을 까. 노란 풍선이 엄마, 아빠를 만났을 까 온통 노란 풍선 이야기만 재잘거리다 잠에 빠져든다. 


  아이를 재우고 나의 책을 읽어야지. 나의 대단한 세계를 다시 불러와야지 하면서도 늘 아이가 잠들면 나도 옆에서 지쳐 쓰러진다. 어쩔 땐 꿈에 달곰이 가 나오기도 하고 토순이가 인사하기도 한다. 꿈의 무대까지 작아져버렸나 아침에 눈을 뜨면 괜히 서글퍼진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1층 어린이 열람실에 머무는 나를 보았다. 예전에 2층 종합자료실에서 신간과 더불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해가 저무는 줄 모르고 하루에 2-3권도 읽고 간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 빌려간 책을 예약하고 도착했다는 문자는 남편과 연애시절 주고받던 편지만큼 설레었다.

도서관 창밖의 해가 저문다. 2층 종합자료실에서 책을 읽던 미혼의 과거 나의 모습도 해와 같이 사라진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집안일을 하고 내 시간이 문득 나면 육아 관련 책을 본다. 이제 나만의 작가들은 멀어져 그들의 책 제목을 봐도 줄거리가 흐릿하다. ‘오은영 박사’의 책은 이제 몇 권 째 보는지 모르겠다. 계속 읽어도 흥미롭다기보다 못난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아 불편하다. 너는 엄마 자격이 과연 있는지 내게 묻는 것 같아 교과서를 보는 기분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늘 책이 많았다. 거실에도 안방에도, 심지어 화장실에도 아버지는 책을 들고 들어가셨다. 단어 뜻도 잘 모르는 시절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장르 가리지 않고 독서를 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시험지를 풀며 긴 지문도 남들보다 빨리 읽고 이해했다. 독서의 효과인지 모르지만 상대의 말에도 나는 이 사람의 요구가 뭔지, 내가 해야 하는 가장 적합한 답변이 무엇인지 잘 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학원보다 책을 많이 읽어주는 엄마가 되어야지 마음먹었다. 

 

  우리 세대보다 미디어의 매체는 무척 다양해졌고, 지금 당장 1초 동안에도 수많은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정보의 출처와 정당성에 대해 판단할 책임감은 더 늘었고, 하나를 꾸준히 탐구할 인내력은 줄어들었다. 활자의 묵직함은 세월이 지나도 늘 우직하게 남아있다. 교복 입던 시절 ‘데미안’과 ‘개미’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 다시 앞 페이지를 넘기곤 했다. 깜깜하던 내용도 신기하게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암개미 56호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어렵던 데미안의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활자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보였고 해석도 다양해졌다. 시대는 발전했지만, 활자의 감동을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중고 서점에서 아이와 책을 구입하기도 하고, 가까운 도서관에서 책을 함께 고른다. 잠들기 전 친정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이에게 책 속의 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론 심각하고, 때론 슬프고, 하지만 어린이 책의 대부분이 그렇듯 마지막은 행복하게 끝이 난다.

 

  피노키오를 같이 읽으며 문득 아이는 내게 잘못을 반성한다. 아침 식사시간에 밥 더 먹기 싫어 토할 것 같다고 거짓말했다며 코가 길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마음을 최대한 숨기고 앞으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해준다. 거짓말의 대가에 대해 다시 피노키오를 통해 알려준다. 내내 심각하던 아이가 훌쩍이며 잠이 든다.

 “엄마.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안심되는 말을 듣고 나도 눈을 감다 과연 내 삶도 정직했었나 돌아본다. 어른이 된 후 피노키오의 교훈을 잊지 않고 지냈는지 지난날을 돌아본다. 

 뭔가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시시하다고 무시했던 아이의 동화 속 세상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온다. 제페토처럼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어른이었는지, 혹시 피노키오를 유혹의 빠뜨린 여우와 고양이가 된 적은 없었는지 생각해본다. 


  왜 아이들의 책이 시시하다고 폄하했을까. 나의 무대를 스스로 시시하다고 무시했을까.

그 어떤 동화도 절대 가볍거나 시시하지 않았다. 다 알고 단순하다 생각했지만 그 어떤 책 보다 정직해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음식 남기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어른이 되어도 지키기 어려운 교훈들이 가득했다. 내 세계는 절대 작아진 것도 시시해지지도 않았다. 단지 나는 어린 시절 내 엄마가 읽어줬던 동화의 교훈들을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지키며 살기 쉽지 않다.

  

  오늘은 아이와 ‘할머니의 여름휴가’를 읽는다. 소라 안으로 할머니와 메리가 들어간다. 아이는 바다 햇볕처럼 눈을 반짝인다. 나의 무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아이는 아이대로 책 안의 할머니와 메리의 바다 여행에 두근거리는 시간이다. 나에게는 생전 하얀 모시한복을 곱게 입은 외할머니가 썰물처럼 밀려오는 저녁 시간이다.

같은 시간,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 모자에게 서로 다른 것들이 밀려들어오는 독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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