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국영 오빠에게
"어떡하니, 아빠가 쓰러지셔서 일어나질 못한다."
국영 오빠, 날씨가 조금 따뜻해졌던 올해 초봄 어느 날 저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저를 찾으시는 엄마의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함께 집 근처에서 식사를 한다고 나가셨던 아빠가
걸음을 헛디뎌 넘어진 뒤 일어나지 못하신다면서요. 그날은 제게 평소처럼 책과 씨름하며 집에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던 보통날이었는데 말이죠.
헐레벌떡 뛰어나가니 아빠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더라고요. 다행히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119에
미리 신고를 해 둔 상태였어요. 얼마 후에 앰뷸런스가 도착했는데 보호자는 한 명만 함께 탈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젊은 제가 낫다고 덜렁 앰뷸런스에 올라탔어요. 젊어 봤자 내일모레 오십이지만요.
“별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덕에 난생 처음 앰뷸런스도 다 타 보네요.”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다행히 아빠가 피식 웃으셨어요. 아직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던지라
응급실에 도착하니 보호자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더라고요. 차비를 아낀다고 지하철을 타고 오신 어머니는 조금 늦게 응급실 앞에 도착하셨고요.
난데없는 부상으로 놀라셨을 아버지는 응급실에 들어가신 뒤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어요.
사실 제가 중년이 된 뒤로는 세상 무서운 게 없던 아버지도 자꾸만 여기저기 아프시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새삼 느끼게 돼요.
‘아, 나도 국영이 오빠가 세상 전부였던 열여섯 살 소녀에서 한참이나 멀어졌구나. 조금 덜 늙은 내가 조금 더 늙으신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 거구나.’
제 마음은 여전히 철없는 소녀에 머물러 있는데 말이죠.
국영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0년이 된 것처럼 제 세월도 훌쩍 흘러가 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오빠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는데 제 시간만 흘러간 걸까요? 근데요, 오빠. 혹시 그거 아세요?
사랑하기 딱 좋은 스무 살 차이, 언젠가 홍콩으로 날아가 국영 오빠랑 결혼하기를 꿈꿨던 제가 중한 번역가가 됐어요. 그것도 무려 책을 번역하는 번역가요. 사람들이 번역의 꽃은 ‘출판 번역’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무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됐어요, 국영 오빠. 심지어 올해로 18년차 번역가랍니다. 번역한 책만 해도 50권이 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번역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며 수업도 하고, 가끔은 통번역 대학원 학생들에게 출판 번역에 관한 특강을 할 일도 생기더라고요.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나이 먹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아프고 약해지는 아빠를 보면 그 생각이 맞는 건지 헷갈리기도 해요. 저는 어쩌면 여전히 몸만 자란 마음 약한 아이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상황이 아직 두렵기만 하거든요.
평생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조금씩 가족 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은 아빠를 보고 있노라니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어느 날 훌쩍 세상을 떠난 국영 오빠가 떠올랐어요. 스무 살 차이, 스무 해... 내 첫사랑 국영 오빠는 저 먼 하늘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솔직히 제가 번역가가 된 건 모두 장국영 오빠 덕분이에요. INTJ라 남의 일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이지만 국영 오빠는 제 청춘의 아니, 평생의 우상이었답니다. 국영 오빠와 결혼하겠다는 꿈은 영영 이룰 수 없게 됐지만 결국 중국어를 배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사람이 됐으니 저는 성공한 덕후라고 해야 할까요?
오빠가 계신 그곳은 추운지 더운지 따뜻한지 시원한지 모르겠지만 제가 있는 이곳은 메마르고 척박하고 살벌하고 좀… 그래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18년 전에도, 지금도 이곳에서 열심히 번역을 하고 있어요. 미적거리다 떠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거든요. 돈은 잘 못 벌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국영 오빠. 제가 이 일을 꽤나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일이 업(業)이 된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고 하잖아요.
인공 지능으로 완전히 대체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놓지 않고 열심히 해 볼 생각이에요.
근데요, 국영 오빠.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고, 번역의 ‘번’자도 모르던 제가 어떻게 번역가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요. 아아, 멀리서도 잘 들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