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없는 삶은 상상이 안된다
한국사람에게 밥 대신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을 얘기하라면 단연 라면일 것이다. 저렴한 가격에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 게다가 다른 음식과의 조화로움은 라면을 따라올 음식이 없다. 최근에는 나트륨 섭취량만 조금 조절하면 나름 괜찮은 식단으로도 회자되고 있다.
SNS에서는 라면 레시피가 쏟아지고 해외에서도 한국라면의 인기는 위상이 높다. 특히 매운 라면의 인기가 좋은데 불닭볶음면 같은 '스파이시 챌린지' 콘텐츠와 맞물려 세계 소비자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단순히 간단하게 한 끼 때우던 음식에서 한국 문화의 수출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먹는 라면은 1963년 삼양식품에 의해서 탄생했다.
1950년대 말,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은 그 당시엔 보험 회사를 운영하며 승승장구했었다. 어느 날 남대문 시장을 거닐다가 사람들이 단돈 5원에 줄을 서서 무언가 사 먹는 걸 봤다. 전중윤 회장은 호기심에 줄을 서서 음식 한 그릇을 받아왔는데 그 음식은 바로 '꿀꿀이 죽'이었다.
알다시피 전쟁 후 모두가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찌꺼기)들을 모아 만든 음식이다.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담배꽁초까지 나오는 음식이지만 너무 배고픈 사람들은 그거라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그 모습을 본 전중윤은 자신이 하고 있는 보험 사업일에 회의감이 들었다.
'당장 굶주림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보험이 무슨 필요지?'
이런 생각에 닿은 전중윤은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품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예전 일본에서 경영 연수를 했을 적에 접했던 인스턴트 라멘이 생각이 났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고 면과 국물까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한국 사정에 딱이라 생각해 이를 들여오기로 했다. 당장 '삼양'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라면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한다.
하지만 딱히 기술이 없었기에 연구는 계속해서 실패했고 그는 당장 일본으로 달려가 여러 라면 회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회사들은 라면 제조 설비 기술에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했다. 이에 전중윤은 응할 수 없었고 계속된 문전박대에 지쳐갔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스프 별첨 라면으로 유명해진 묘조식품의 오쿠이 사장을 만나게 된다. 전중윤은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운이 좋았던 건지 오쿠이 사장은 전중윤을 만나기 전 이탈리아 기업으로부터 큰 호의를 입은 상태였고 자신이 받았던 호의를 베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라면 제조 기술을 전수받고 다른 회사에서 제시한 금액의 1/5로 제조 설비를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스프 배합에 대해서는 회사기밀로 알기 힘들었다. 그렇게 돌아가려던 찰나 공항에서 오쿠이 사장의 비서를 통해 편지를 받게 되는데 거기엔 회사기밀인 스프 배합비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첫 라면 '삼양라면'이 탄생했다.
처음 삼양라면은 닭고기 베이스의 맑은 국물이었다. 60년대 당시 쌀 생산량이 부족해 박정희 정부는 밀가루를 활용한 혼분식을 장려하고 있었다. 라면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사람이 좋아하는 '고춧가루를 넣어보는 게 어떻겠냐'며 의견을 냈다.
삼양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고춧가루를 포함하고 육수도 닭고기에서 소고기로 교체했다. 이후 첫 출시 가격은 '10원'. 그 당시 김치찌개백반이 30원, 짜장면이 20원이었던 시절이고 짜장면은 특별한 날에나 먹는 음식이었다. 라면의 가격은 꽤나 고가의 음식인 셈이었다.
처음 라면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무슨 음식인지 몰라 삼양은 길거리 시식회도 열면서 라면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시식회라니, 지금 보면 앞서가는 생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양이 그다지 많지 않고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편하게 먹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라면은 손님이 올 때나 대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검정 고무신에서도 이 점을 반영한 에피소드가 있었으니 서민들에게는 고급음식이 틀림없었다. 이렇다 보니 대중적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라면의 상승세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수십 년간 출시되었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라면도 많고 새로운 라면은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지금 편의점만 가도 다달이 새로운 라면이 나오는 추세다. sns에서 라면을 창의적으로 변형해서 즐기기도 하고 그걸 모티브로 제품이 출시되기도 한다.
이런 흐름에서 '간편한 한 끼'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전환을 시도하기도 한다. 일부 컵라면은 2~3천 원을 넘기도 하고 고급 재료를 담은 라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단순히 배만 채우던 음식이 아니라 넓은 미식의 영역으로 커지고 있다.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하나의 체험 콘텐츠로도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구미 라면축제는 매년 수만 명이 방문하는 행사로 성장했다. 구미는 국내 최대의 농심 라면 공장이 있는 도시다.
그리고 서울 홍대에는 CU의 '라면 라이브러리(Ramyun Library)'가 있다. 100종 이상의 라면을 골라 즉석으로 끓여 먹을 수 있다. 흔하게 보기 힘든 라면을 여기에서 먹어볼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코스로 유명하다.
이처럼 라면은 '먹는 여행'의 매개체가 되어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경험형 문화재로 확장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한 기업이 국민들을 위해 탄생한 음식이 지금은 세계를 휘어잡고 있다. 매운맛 트렌드를 선도하고, 새로운 맛과 조리 방식에 도전하며, 때로는 문화 콘텐츠로, 때로는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도 한다. 앞으로 어떤 맛과 경험을 만들어낼지 한국 라면의 다음 장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