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향이 나는 도시의 이야기
대전은 한동안 ‘노잼도시’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별한 관광지가 없고, 일부러 여행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대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유잼도시’, ‘빵지순례의 성지’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으며 매년 관광객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밀가루 왕국”, “밀가루 도시”, “빵 하면 떠오르는 곳”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전이 거론된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대전의 대표 브랜드가 된 ‘성심당’이 있다.
성심당은 단순히 유명한 빵집이 아니라, 대전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상징적인 존재다. ‘빵 사러 대전에 간다’, ‘빵 쇼핑의 성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다. 대전 시민들뿐 아니라 타지인들도 여행 목적지로 대전을 선택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성심당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대전 내 다양한 개성 있는 빵집들이 함께 성장하면서 “대전은 빵이 맛있는 도시”라는 인식이 더욱 굳어졌다. 실제로 지역에서는 ‘빵축제’까지 개최하며 도시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빵에 진심인 도시다.
대전=빵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지만 사실 대전의 본래 정체성은 ‘면의 도시’에 더 가깝다. 오늘날의 빵 문화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대전은 오랜 기간 면요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였다. 대전에 빵이 많아진 이유도, 면요리가 발달한 이유도 결국 하나의 공통적인 배경에서 비롯된다. 바로 ‘밀가루’다.
밀가루는 빵뿐 아니라 칼국수, 수제비, 국수 등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기본 재료이며, 대전이 밀가루와 깊게 얽히기 시작한 데에는 지리적·역사적 요인이 자연스럽게 작용했다.
먼저 지도앱을 켜보자. 대한민국을 보면 대전의 지리적 특징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전은 대한민국의 정확한 중부에 자리한 도시다. 국토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곧 전국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한 교통 요지라는 의미다. 이 지리적 장점은 오래전부터 대전을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전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4년 호남선 개통이다. 이 두 철도 노선이 대전을 교차하듯 지나가면서 대전은 전국 물자의 흐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핵심 도시가 된다. 그중에서도 ‘밀가루’는 대전의 음식 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대전은 유엔군과 정부의 구호물자가 모이는 집산지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밀가루가 대전역 인근으로 대량 유입되었고, 자연스럽게 지역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1960~197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서해안 간척사업과 같은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에 동원된 노동자들에게 임금 대신 밀가루가 지급되는 일이 흔했다.
돈 대신 받은 밀가루를 대전역 주변 시장에서 되팔거나 교환하면서 밀가루는 더욱 널리 퍼졌고, 대전은 점점 ‘밀가루 중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된다. 즉, 대전에서 밀가루 음식이 발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와 구조가 만든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오늘날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KTX로 1시간이면 도착한다. 부산까지 가는 데도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1980~1990년대만 하더라도 기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데 5~8시간이 걸렸다. 느린 이동 속도 때문에 사람들은 기차 안에서 끼니를 해결하거나, 잠시 정차하는 역에서 급히 음식을 먹는 일이 매우 흔했다.
전국의 다양한 노선 중에서도 ‘가장 중간 지점’에 위치한 대전역은 그야말로 수많은 승객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지점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대전역 플랫폼에서는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가락국수가 유명했다. 이 가락국수는 대전의 또 하나의 얼굴로 자리 잡으며 칼국수 문화와 함께 발전했다.
대전은 지금도 칼국수집이 유난히 많기로 유명하다. 부산에 돼지국밥집이 많지만 그중에서 진짜 맛집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대전 역시 칼국수집이 너무 많아서 골라 먹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대전은 칼국수 도시”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도시 정체성에 가깝다.
이 수식어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2023년 12월 기준 자료에 따르면 대전 내 칼국수 전문점은 무려 727곳이다. 인구 1만 명당 5.0곳 꼴로, 이는 국내 7대 특·광역시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다시 말해 대전 시민들은 칼국수를 일상적으로 즐겨 먹으며, 칼국수는 지역 음식 문화의 핵심에 놓여 있는 셈이다.
특히 대전이 면의 도시로 돋보이는 이유는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칼국수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동죽(물총) 조개가 듬뿍 들어간 ‘물총칼국수’, 얼큰하면서도 깊은 맛의 ‘매운칼국수’, 칼국수 면을 양념에 비벼 먹는 ‘비빔칼국수’ 등이 있다.
우리는 보통 오징어볶음이나 제육볶음 같은 요리에 소면이나 우동 사리를 비벼 먹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대전에서는 아예 칼국수 면 자체를 비벼 먹는 문화가 자리 잡아 있다. 사리면을 칼국수로 대체해서 먹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대전은 단순히 빵만 유명한 도시가 아니다. 대전은 역사, 지리, 산업의 변화 속에서 ‘밀가루 문화’를 독특하게 발전시킨 도시다. 밀가루라는 재료가 빵과 면이라는 서로 다른 음식으로 확장되며, 도시의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만든 셈이다.
최근에는 ‘빵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지만, 그 바탕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면의 도시’라는 역사적 정체성이 있다.
다시 대전을 찾는다면 성심당에서 빵을 사는 것도 좋지만, 대전 곳곳에 숨어 있는 칼국수 맛집과 역사를 경험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대전을 현재의 ‘유잼도시’로 만든 가장 맛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