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의 모험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얼마 전, 한 독자에게 받은 메일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출판하는 마음』을 재밌게 읽었다는 다정한 인사가 담긴 내용이었는데, 특히 저 ‘모험’이라는 근사한 단어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겁도 없이(?) 1인출판을 시작하고부터 하루하루가 좌충우돌 모험의 연속인지라 마치 모르는 독자가 속마음을 읽어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한 통의 메일 덕분에 그날은 모험을 나서기 전 신발 끈을 더 단단히 묶은 것도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모험을 합니다. 누군가는 잔잔한 호수처럼, 누군가는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또 누군가는 철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감기처럼 삶의 매 순간 자기만의 모험을 헤쳐 나갑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저는 ‘습관성 모험가’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대책 없이 판부터 벌이고 보는 편인데(혹자는 제가 출판사를 차렸다는 말에 ‘알고 보면 조용히 사고 치는 스타일’이라고 ‘팩폭’을 가하기도 했습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저의 ‘대책 없음’이 제철소를 시작한 가장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제가 좀 더 생각 많고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10년 넘게 한 직장 생활을 그만두지도, 출판사를 열지도 못했겠죠. (그랬다면 변액보험을 깰 일도 없었을 텐데…) 여하튼 습관적으로 일을 벌이는 팔자를 타고난 덕분에 제철소는 출판계라는 세계에 발을 내디뎠고, 날마다 초특급 버라이어티 어드벤처를 하는 기분으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제철소는 희곡집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첫 책으로 본격적인 모험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13종을 냈으니 두세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만든 셈이네요. 몸에 좋은 제철 음식처럼 우리 삶에 이로운 제철(rightseason)의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이름을 지었으나, 단어 특성상 일반명사임에도 앞에 특정 지역이 붙은 고유명사로 읽히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상상력이 뛰어난 분들은 ‘철공소’ ‘제면소’ 등으로 바꿔 부른다죠…), 뭐 나름 좋은 점도 있습니다. 거래처와 통화할 때 출판사 이름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생기는데, 상대방이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경우(대부분입니다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면 100%입니다.
포항제철소 할 때 그 제, 철, 소요!
출판사마다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제철소에겐 희곡이 그렇습니다. 저는 연극을 전공했고, 가끔 희곡을 쓰고 있고, 지금도 소극장을 즐겨 찾습니다. 적어도 1인출판사의 경우, 그 ‘1인’의 ‘최애’ 관심사가 출판 기획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제철소의 첫 책은 자연스럽게 희곡집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4종의 희곡집을 펴냈고, 적어도 1년에 한두 권은 내자는 나름의 목표를 갖고 있지요. 다만 안타깝게도, ‘태생적 가난’을 안고 있는 장르인지라 매출에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저는 습관성 모험가이고, 희곡집 타이틀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없던 시장이 생기겠…(하아, 그만할게요). 희곡집을 내겠다는 얘기에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굳이 왜 네 돈 들여 그런 모험을 하니?”였으니, 희곡집이 제철소의 가장 큰 모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철소의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은 위고, 코난북스와 함께 꾸려 나가는 ‘아무튼 문고’가 아닐까요. 덕분에 제철소라는 이름을 좀 더 많은 독자에게 알린 고마운 시리즈이지요. 지난해 2월, 설 선물로 실한 굴비가 들어와서 함께 나눠 먹으려고 이웃 출판사 위고에 들렀습니다. 마침 코난북스 대표님도 와 있더군요. 한데 모두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나만 빼고 다들 오늘 주문이 많이 들어왔나 보군’ 살짝 우울해지려는 찰나, 두 분이 재미있을 것 같은 기획이 있으니 함께하자고 하더군요. 세 출판사가 힘을 합쳐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를 만들자는 것.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라니! 게다가 ‘함께’라니!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아이템과 그에 어울리는 저자 리스트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머릿속에 차르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나 혼자 기획하고 나 혼자 편집하고 나 혼자 밥 먹으며 켜켜이 쌓인 1인출판사의 절대고독이 단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래, 아무튼 해보지, 뭐! (역시나 대책이 없었군요…) 물론 개성도 취향도 전혀 다른 세 출판사가 하나의 시리즈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실험이고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모험일수록 그러하듯 짜릿한 순간을 가장 많이 안겨준 기획이기도 합니다. “우리 적어도 99권까지는 내보자!” 하고 시작했으니(역시나 제가 한 말 같군요…) 아직 갈 길이 먼, 그래서 더 가슴 뛰는 모험입니다.
제철소가 이제 막 시작한 또 하나의 모험은 ‘일하는 마음’입니다. ‘일하는 마음’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노동을 관찰하고 그것이 개인의 삶,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고 읽어내는 인터뷰집 시리즈입니다. 사실 출판사를 준비하면서부터 생각한 나름 야심에 찬(!) 기획인데요. 지난봄에 저자, 편집자, 번역자, 디자이너, 제작자, 마케터, 서점인 등 책을 짓고 펴내고 알리는 이들의 마음을 담은 은유 작가의 『출판하는 마음』으로 첫 발을 뗐습니다. 앞으로 『문학하는 마음』 『미술하는 마음』 『영화하는 마음』 『연극하는 마음』 『과학하는 마음』 등 후속 타이틀을 꾸준히 펴낼 계획입니다. ‘월요일’과 ‘텅장’으로 점철된 우울한 현실에서도 삶과 노동의 연대와 사유를 스스로 찾아 나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시리즈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봅니다.
출판사를 차리고 몇 권의 책을 낸 뒤 기다렸다는 듯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아니, 뭘 했다고?) 편집뿐 아니라 마케팅, 제작, 정산 업무 등을 처리하느라 나 혼자 허둥대고는 있는데, 정작 세상 그 누구도 제철소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 외롭고 힘든데 그렇다고 울기엔 좀 애매한 그때, 투고 원고 하나가 날아들었습니다. 저자는 메일에서 그간 독자로서 제철소 책을 관심 있게 봐왔고, 첫 책을 꼭 여기서 내고 싶은 마음에 용기 내어 문을 두드린다고 적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난 가장 구체적인 독자의 얼굴이었습니다. 원고는 젊고 생기 넘쳤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뛸 만큼요. 편집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초고라니! 당장 만나자고 연락을 했습니다. 직접 만난 저자는 글만큼이나 젊고 생기 넘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그 원고는 『베를리너』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베를리너』를 만드는 내내 참 각별하고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캄캄한 무대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반짝, 조명 하나가 켜진 느낌이랄까요. 그래, 조금 더 해 볼 수 있겠다 싶었고, 그렇게 또 대책 없이 한 권 두 권 책을 만들다 보니 어느 순간 반짝, 반짝반짝.
곧 출간을 앞둔 교정지를 마주하고 앉아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독자들의 얼굴을 상상해봅니다. 이 책을 펼쳐 볼 두 손의 온도도요. 그 눈빛과 체온을 떠올리며, 오늘도 제철소는 한철이 아닌 제철의 독자들을 찾는 마음으로 점점 침침해져 가는 눈을 부릅뜬 채 원고를 들여다봅니다. (앞으로 책 좀 읽어볼까 마음먹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시길. 노안, 생각보다 금방 와요…)
참! 제철소의 모험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겠다던 그 독자분께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합니다.
제철소는 이 모험을 계속해보겠습니다. 쉬이 지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이 브런치 '위클리 매거진'은 스토리펀딩의 "모험을 시작한 작은 책들"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작은출판 컨퍼런스의 참여권은 펀딩을 통해 구매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