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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헌드리더 Jul 18. 2018

더 나은 삶을 향해 여행하는 책







# 가지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



“1인출판사를 차릴까 해. 회사 이름을 고민 중인데 아이디어 좀 없어?”

“출판사? 혼자?”

“그냥 너무 무리하지 않고 내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만들면서 문 닫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됐으면 해. 내가 이 일을 여전히 좋아할 때까지, 단 스무 가지 책이라도 내보면 좋겠다.”

“스무 가지라… 어, 가지 어때? 어감이 예쁜데. 그 말에 의미를 담아봐.”


내 인생에 난제들이 쌓일 때 가끔 만나서 조언을 듣던 선배와의 대화. 그때 내가 왜 스무 권이라거나 스무 종이라고 하지 않고 스무 가지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엉뚱하게도 그게 진짜 내 출판사의 이름이 됐다. 


가지. 

처음에 생각나는 건 맛있는 채소.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색깔. 

그리고 새봄의 싱싱한 나뭇가지. 

또 하나, “그래, 이렇게 계속 가지(go on)”라고 말할 때의 뉘앙스. 


먹는 가지, 나뭇가지, 가지가지?


며칠을 머리로, 입으로 단어 하나를 굴리며 다니다가 맨 처음 나도 모르게 뱉었던 ‘스무 가지의 책’에서 출판사에 담을 의미를 골라냈다. 

한 가지, 두 가지, 가지가지 할 때의 가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여럿 속에서 존재를 구별하는 말. 무수하게 많은 책의 시장에서 책이 마땅히 품어야 할 다양성과 넓이를 생각하며 ‘그래, 이런 책도 하나쯤 있어야지’ 주장할 만한 책을 만들자. 

로고는 가지 색으로, 날마다 새 잎을 틔우는 새봄의 나뭇가지처럼 책을 만들면서, 내 인생도 당분간 이렇게 가지! 




# 삶은 여행이니까


어차피 인생이란 불안을 껴안고 오늘의 모험을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진은 《엄마, 나는 걸을게요》 중에서.


그냥 그렇게 가벼운 출발이었다. 몰라서 매우 용감한. 

나만 흡족하면 되었던 1인출판의 구상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었는지를 지금은 안다.     


출판사 창업 4년 반. 

‘자유로운 상상을 실현하는 출판기획자로, 편집자로 가난하게라도 살아보자’ 했던 나는 이제 하루의 상당 시간을 무능한 회계인으로, 영업인으로, 또 출판의 복잡한 업무들을 이어주는 연결자로 기능하며 산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회의에 빠져드는 순간도 적지 않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불안을 껴안고 오늘의 모험을 즐기는 것.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으므로, 나는 그저 여기서는 내가 만든 책들의 모험 이야기만 들려드리겠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고 삶 자체를 ‘여행인 모드’로 살아가려는 나에겐 내가 만든 책들이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본디 책은 여행과 닮은 데가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색, 익숙한 것도 낯설게 보기,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나의 본질에 더욱 바짝 다가서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여기서 말하려는 여행은 독자의 시점의 아닌 ‘전지적 책의 시점’에서의 여행이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점차 멸종되어 가는 종이책 독자들을 찾아가는 여행, 지적 욕구가 있지만 취향도 참 까다로운 독자들의 마음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늠하며 함께 걸어가는 여행 같은 것. 


책을 만드는 일도 여행과 비슷하다. 하나하나 쌓여가는 출간본들, 그리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 가제본 책들.




# 외부자로서의 책



“1인출판으로 어떻게 여행 시리즈를 만드세요? 대단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나와 같은 1인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 출판사 대표들에게서도 듣는다. 내가 너무 무모했던 것일까?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책의 목록이 인문여행의 길을 제시하는 ‘세계를 읽다’ 시리즈였던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여행기자 시절 도서관과 주요 신문사 정보센터를 뒤지며 항상 찾아다녔던 것이 내가 갈 곳들의 뿌리와 문화를 읽어주는 텍스트였는데, 생각보다 찾기가 쉽지 않고 정보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무수하게 많은 책의 시장에서 왜 이런 책은 없는가, 라고 독자로서 가장 먼저 떠올린 테마.


여행자가 갖춰야 할 유일한 준비물은 그 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다.


창업 초기에는 후속작을 빨리 붙일 수 있는 번역서 시리즈를 론칭하고 ‘여행자를 위한 도시인문학’이라는 국내여행 시리즈를 개발해 나가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당장 먹고 자고 놀 정보라고는 하나 없이 그 나라와 도시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적 배경지식만 교과서처럼 체계적으로 읽어주는 책.

첫 권을 만들어서 서점을 돌아다녀 보니 시장의 반응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책이 여행서라고요?
여행서가 아니면 무엇인가요? 세계를 읽다 시리즈.


시리즈 첫 책이 나오고 2, 3권이 나오도록 대형 서점의 역사문화 파트와 여행 파트에서 서로 상대편 매대에 더 잘 어울린다며 등 떠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점차 인문여행 수요가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지금도 여행서 시리즈를 한 줄로 꽂아두는 책장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여행 시리즈는 정보서만'이라는 기준이라도 있는 건가?

시리즈 10권 째 책을 편집하고 있는 지금도 의문은 다 풀리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에 봉착할 책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년에 시리즈 제1권을 펴낸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부산》과 섬의 살림문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문 에세이 《섬:살이》가 그 예다.

국내 인문여행을 돕는 도서들.


내가 좋아하는 여행자로서 삶의 스탠스 중 하나는 ‘여행자는 외부자’라는 것이다. 내가 처음 도착한 어느 곳에서든 무례한 침입자로 여겨지지 않으려면 그 문화에 대한 존중과 사전 이해가 필수적이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열림,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 모든 타자에게 공정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태도. 그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는 책들을 앞으로도 계속 펴나갈 생각이다.

나의 독자는 어디 계신가요?




# 관찰자로서의 책 



내가 좋아하는, 여행자로서 삶의 스탠스 두 번째는 ‘여행자는 관찰자’라는 것이다. 책 만드는 사람으로, 그것도 내 손이 아니면 아무것도 굴러가지 않는 1인출판사 운영자로 책상 앞에 눌러앉는 삶을 선택한 나는, 여행의 새 장르를 발견했다. 비행기 티켓을 끊지 않고 시내버스 한 대 타지 않고도 문 밖에 나서기만 하면 새롭게 나타나는 여행지, 바로 자연이다.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발견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 《겨울정원》 중에서.


누군가에게는 진부한 레토릭일 수 있지만, 눈 뜨니 자꾸 보이고 더할 수 없이 큰 세상이 자연이었다. 내가 더 알고 싶고 좀 다르게 보고 읽고 싶어서 저자를 찾아 나섰다.


그동안 이런 책들을 펴내셨던데 이런 방향으로 써보는 건 어떠세요?
제가 궁금한 건 이런 거예요….


저자와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생태 관련 도서들을 펴냈다. 이 분야에서는 아직 번역서를 낸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를 저자와의 많은 대화 속에서 얻어왔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은 빨간 열매를 주웠습니다》 《꽃을 기다리다》 그리고 《내 안의 자연인을 깨우는 법》이라는 최신작에서 자연관찰의 깊은 내공과 탁월한 그림 솜씨를 보여준 황경택 작가와는 특히나 손발이 잘 맞았다. 그동안 숲 해설가들의 선생님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책도 많이 썼지만 자연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일반 독자와는 소통할 기회가 별로 없던 저자에게, 나의 ‘근본 없는’ 속사포 질문들이 새로운 창작열을 지피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꽃을 기다리다》 책 속에 담긴 그림들. 식물이 꽃을 피우기까지의 온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무튼 이 분야는 내가 가장 잘 알리고 싶고 많이 팔고 싶은 책들이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읽고 감상할 수 있는 데다, 책이 주는 감성적 기쁨이 정말 큰 분야이기 때문이다.

자연 관찰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책들.




# 비기너로서의 책



여행자는 비기너다. 그건 몇 번을 가도 그렇다.
책을 만드는 일도 그렇다. 창업 후 23권의 책을 만들었지만 언제나 다시 시작점에 서는 기분이다.


가지출판사의 출간 방향 가운데 또 하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것이다. 소박하고 윤리적인 삶, 바쁜 인생에서 자아를 잃지 않는 균형점 찾기, 삶의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는 지혜….

거창한 담론의 펼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만족감이 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한번쯤 들여다봐야 할 주제를 찾아 입문자용 책을 꾸준히 펴내려고 한다. 일상의 ‘작은’ 변화로 가져올 수 있는 ‘좋은’ 효과들을 ‘쉽게’ 공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지구를 걱정하는 ‘윤리적 소비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최소 지식들을 모은 《에콜로지스트 가이드》 푸드와 패션 편,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소프롤로지 마음치유 운동법을 소개한 《몸을 씁니다》, 미니멀리즘의 작은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인생은 간결하게》가 있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일상 개조 교양서.
인생의 특별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들도 출간한다.




# 돌아보면 그냥, 우리들의 책



지난 출간 목록을 보며 책의 여행을 되짚다 보니 영화제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이 왜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느라 헉헉대는지 알겠다. 참으로 소박한 목록이지만 편집자 입장에서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이 없었던 출간 리스트다.

나는 가끔 우리 인생이 한 권의 책만큼 가볍고 또 그만큼만 무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딱 그 정도의 책으로 독자들이 만만하게 들고 봐줬으면 좋겠다. 책이 있어 내 인생이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고, 나로 인해 책이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을 동시대의, 나와 취향이 닮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가지가지 세상 여행하듯 기웃거리며 만든 책이 어느덧 창업 초기에 목표했던 20종을 넘었다. 
아직 안 망했으니 성공이라 해야 할까? 
알고는 갈 수 없는 여행길도 있는 법인데, 내 보기엔 출판이 그렇다.
그때 몰랐던 게 다행이었을까?


  

아무튼 나는, 이 여행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독자님들도 부디, 함께 걸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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