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일본의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1949~)의 신작『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되었다. 이는 그가 서른한 살에 문예지에 발표한 뒤 출간하지 않았던 작품을 사십년이 지나 대폭 고쳐 발표한 책으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 중 한 사람으로 이번 작품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세계와 실재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흥미롭게 읽었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일곱 살의 주인공인 나는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에서 열여섯 살의 여고생인 소녀를 만나게 되고, 서로 좋아하게 된다. 소녀는 나에게 눈앞에 있는 자신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며 자신의 실체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안에 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소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나는 그 도시의 모습을 상세히 기록해 둔다. 어느 날 소녀는 돌연히 사라지고, 나는 소녀를 그리워하고 괴로워한다. 나는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마흔이 된다. 그 동안 다른 누구를 만나 사귀기도 했지만 소녀의 존재를 잊지 못해 고독한 생활을 한다. 변함없이 소녀를 생각하며 소녀의 기억을 더듬는다. 마흔다섯 살 생일, 갑자기 구덩이로 쿵 하고 떨어진 내가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소녀와 이야기했던 그 도시 안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소녀를 그리워하는 현실세계의 나와 ‘그 도시’에서 ‘꿈 읽는 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나의 모습이 교차되며, 2부의 현실세계의 도서관 관장이 된 나, 3부의 다시 그 도시에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1부에서 그 도시에 들어간 나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도시의 도서관에서 소녀는 꿈을 관리하고 나는 ‘꿈 읽는 이’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도시의 문지기에게 그림자를 맡겨야 한다.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나는 나의 분신인 그림자가 나와 떨어져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림자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기로 마음먹는다. 도시의 벽은 자유자재로 모양과 위치를 바꾸며 한번 들어온 자는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그 도시안의 높고 견고한 벽은 그 앞을 막고 나갈 수 없게 만든다. 그림자는 나에게 말한다.
“보는 것도 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서울: 문학동네, 2023, 206쪽.
결국 그림자만이 그 도시 밖으로 나가게 되고, 2부에서는 현실세계의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현실세계 중년의 나는 시골의 작은 도시의 도서관 관장을 맡게 되고, 전임자 고야스씨에게 인수인계를 받게 된다. 도서관 관장직에 익숙해질 때쯤 고야스씨가 유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소설의 후반부, 현실세계의 내가 나의 전임자 고야스씨의 유령에 대해 회고할 때 벽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되풀이 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서울: 문학동네, 2023, 684쪽.
3부에서는 그 도시에서 ‘꿈 읽는 이’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나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만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나의 그림자를 찾아 그 도시를 떠난다. 그 도시의 ‘꿈 읽는 이’의 후임이 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나에게 말한다.
“그가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그렇게 믿으세요. 당신의 분신을 믿는 건 곧 당신 자신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서울: 문학동네, 2023, 761쪽.
필자는 이 세 장면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인 ‘벽’과 ‘그림자’의 메타포(Metaphor)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카를 구스타프 융(G.G.Jung, 1875~1961)의 그림자 이론을 떠올렸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은 정신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있어 그림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림자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으로 자아의 어두운 면을 말하며, 인간은 자기실현을 위해 그림자를 인식하고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하루키의 글에 적용시켜 본다면, 소설 속 나는 그림자를 제거해버렸으나 결말에는 그림자와 함께 하는 것을 택한다. 다시 말해서 그림자, 즉 자아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대면하는 것이 진정한 나를 완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열등한 부분 또한 전일한 나의 일부이며, 그림자의 의식화가 이루어질 때 나의 전체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이 소설은 나의 내부 속에서 정체성, 즉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본다. 나는 소녀를 찾기 위해 그 도시에 들어간다. 사랑(욕망)을 좇아 그 도시에 들어간 나는 나의 자아(그림자)와 떨어져 그 도시에 남기를 선택한다. 현실세계로 던져진 나의 그림자는 전(前) 관장인 고야스씨를 만나고 혼돈 속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간다. 도서관에서 만나게 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혼돈 속에 갇혀있던 지난날의 나의 모습과도 같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나에게 자신과 나는 본래 하나라고 말하며, 그 도시로 가서 ‘꿈 읽는 이’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그 도시에 있던 나는 현실세계의 나의 그림자를 찾아 떠나며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사람은 현실적인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자하기 마련이며, 융의 관점에서 자신과의 만남은 우선 자신의 그림자와의 만남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 도시는 나의 무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나와 그림자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의 존재 또한 모호하게 느껴진다. 작가 후기에 하루키는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서울: 문학동네, 2023, 767쪽. 라고 말한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소설 속에서 하루키는 우리에게 진실을 전달한다. ‘당신이 느끼는 벽은 실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으로 만든 벽입니다. 당신 자신을 믿고, 당신의 자아를 찾아가세요.’라고 말이다.
이 글은 2024년 1월 12일 <웹진 오늘의 선비>에 기고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