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수엔 날 앞지르는 사람 뿐이다. 잘 달리지 못하는 나는 어릴 때부터 꼴등을 도맡았다. 혼자 하는 러닝은 심판이 없으니 마냥 즐거울 줄 알았는데 막상 뛰다 보면 경쟁심이 생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옆을 제치고 나갈 때마다 지는 기분이 든다. 인스타그램에선 더 하다. #러닝기록, #러닝인증 같은 걸 검색하면 나와 수 분의 차이가 나는 기록들의 홍수. 고작 열댓 번 뛰어놓고 몇 년을 달린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우스운 줄 알면서도 부러웠다. 질투가 났다. 왜 나는 속도가 늘지 않을까.
나는 평생을 질투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좀스러운 마음이 머리 꼭대기를 차지하는 게 자존심 상했다. 온화하고 여유 있는 사람인양 살고 싶은데 속에선 늘 불이 났으니까. 나보다 저걸 더 잘하는 쟤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미 하는 걔를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는 차라리 그 일을 하는 걸 멈췄다. 하지 않으면 부러워 할 일도 없으므로. 가령 나보다 더 잘 달리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아예 달리기를 그만두는 식이다. 상등신이 따로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없앴으니 마음엔 평화가 찾아올지언정 그 일에 대한 성취는 영영히 갖지 못하는 데도.
최근 허리를 다쳤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치료를 위해 몇 번이나 병원을 왔다 갔다 했다. 당장 뛰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요즘은 허리 운동을 위해 삼십분 정도 걷는다. 뛰던 코스를 걷기만 하는 건 생각보다 지루하다. 가쁜 숨으로 뛰는 사람들이 여전히 날 앞질러 갔다. 뛸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이젠 하다 하다 뛰는 걸 부러워하냐. 어이없어 정말. 문득 노년의 나를 상상해봤다. 뛰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을 그때의 나. 뛸 수 있는 젊은 몸을, 그러나 노력한다고 얻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게 될 나. 그때에의 질투는 정말로 무의미하고 쓸모가 없을 것이다.
질투도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애쓰면 닿을 수 있는 것들을 부러워할 때. 그때에의 질투는 쓸모가 있다. 지금의 나는 성취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갈망한다. 나서서 관뒀던 기억들이 범람한다. 거기에 머물렀어야 했는데. 지는 기분이 싫어 관두었던 모든 순간, 나는 나에게 실패하고 있었다.
어차피 착한 어른이 되는 건 그른 것 같고, 평생을 시기 질투 없이 살 수 없다면 떳떳한 어른이나 되자. 한 번 더 쓰고, 한 번 더 뛰고, 한 번 더 움직이고. 그러다 결국 원하는 걸 갖지 못한다 해도 잘 싸운 거라고. 졌어도 멋졌다고 말할 수 있는 스스로에게 떳떳한 어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