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힘
백가지의 도전을 현실에서 기적처럼 이루는 남자.
인간 백현기. 작가의 삶을 선언한 이후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그동안 그럴듯한 필명 하나 없어 고민했다. 그렇다고 본명을 쓰자니 어색했다. 차라리 가상의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 이름대로 살면서 글도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흔히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버킷리스트라고 부르는데,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게임기를 가지는 것도 그중 한 가지일 터다. 이십 대에는 하고 싶은 일, 가지고 싶은 것, 만나보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곳 등 나만의 리스트를 계속 적었다. 이루어 놓은 성과에 빨간색 펜으로 상선을 그을 때면 마치 도장 깨기로 하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태어날 때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은 헛된 허망을 쫓지 말고 성실하게 작은 일을 하나씩 이루며 살라는 의미였다. 이름 덕분이었을까 쉬지 않고 도전을 반복하는 내 모습을 보니, 사람 이름이 중요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맨 처음에는 글 잘 쓰는 법을 몰라 SNS에 몇 줄 적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말을 이어 붙이는 능력이 생겼다. 그때 활용한 앱이 있다. ‘씀’이라는 하루 하나의 주제가 무작위로 주어지면 특정 주제나 형식에 제한 없이 쓰기만 하면 됐다. 그때 사용한 이름은 ‘썲’ 이었다. 고민 하지 말고 쓰고 보자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의미로 ‘인생 초보, 초보 작가’, ‘글린 이’ 이라 했다. 그땐 비슷한 이름을 쓰는 가입자가 있어 사용 못 했다. 그럴싸한 이름을 지으려 인터넷을 켰다가 엉뚱한 연예인 기사, 웃긴 동영상을 보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쓴 이름이다.
이제는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데 가장 크게 이바지했다고 본다. 무작정 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쓰다 보니 꿈이 생겼다. 혼자 끄적이는 수준에서 나의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감받고 싶었다. 40대가 되기 전 버킷리스트가 책 쓰기였는데 만 나이가 없어지면서 덕분에 반년 정도 여유가 더 생겼다.
올해 9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다른 작가들과 뜻이 맞아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해 공저를 준비하고 있다.
10월에는 출판사와 계약서도 썼다. 몇 번의 퇴고를 거쳐야겠지만 곧 세상에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기대를 또 다른 출간 준비에 투입하고 있다. 작가 백현기. 사실 의도 했던 대로 평생 백 권의 책 쓰기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써볼 생각이다.
출간 계약 때 다른 김수진 작가가 물었다. ‘이름이 뜻이 궁금한데 알려주실 수 있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잘 풀어 이야기 해줬다. ‘백 가지의 도전을 현실에서 기적처럼 이루는 남자'라는 의미입니다.’ 덕분에 자리에 있었던 다른 작가들도 단번에 내 이름을 기억하겠단다.
이지선 작가는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필명을 지어 달라며 부탁했다.
24년도 4월 브런치 이야기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답장 메일이 왔다. 작가 활동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내 이름을 검색해봤다. 없었다. ‘앗싸!’를 외치며 바로 작가 등록을 마쳤다. 이젠 SNS 작가 백현기. 이름이 내 정식 간판이 됐다.
24년 3월부터 잠실 교보문고에서 매달 열리는 자이언트 작가 사인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서울 중심가까지 가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다. 직접 운전하면 2시간 반을 달려야 한다. 버스를 타도 3시간. 그나마 기차 노선이 한 시간에 2번씩 있어 갈만했다.
물론 이때도 집에서부터 역까지는 직접 운전을 해야 한다.
자주 인사를 나누는 작가 몇 명이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강원도에서 기차 타고 왔다고 하니 다들 놀란 반응이다. 강원도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는지,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는지 묻는다. 따지고 보면 경상남도 창원에서 네 다섯 시간씩 버스 타고 오는 작가도 있고, 대구에서부터 몇만 원씩 하는 KTX 타고 오는 작가와 비교하면 나는 양반이었다. 그런데도 강원도라는 말만 나오면 ‘우와’를 했다.
작가 사인회가 끝나면 근처 예약된 식당에서 뒤풀이가 진행됐다. 처음엔 어색함에 그냥 갈까도 했다. 대부분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가장 많은 작가는 지금 내 나이의 곱빼기인 사람도 있었다. 더군다나 남성 작가 숫자까지 얼마 안 됐다. 우물쭈물 하는 모습을 이은대 대표가 봤는지 귓속말을 했다.
‘이름처럼 열정 좀 가지고 삽시다. 이름만 멋있으면 뭐합니까. 이런 모임에서 또 도전을 해보세요.’
이름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백 가지의 도전을 반복하다 보면 그 경험이 쌓여 글감이 되고 나중엔 책으로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경험으로 책을 쓰고 싶었다.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법’,‘나이 많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법’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표정으로는 숨겼다. 못 이긴 척 다른 작가들의 뒤를 따랐다. 가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뒤풀이 장소에서는 마이크와 노래방 반주 기계까지 설치돼있었다.
“오늘 새로운 분이 계시죠?. 자기소개 한번 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이런 자리가 떨리고 어색할 겁니다. 다들 환영의 손뼉 크게 쳐주세요.”
이건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쭈뼛쭈뼛 마이크를 받아들고 무대 가운데에 섰다. 눈앞이 하얬다. 어림잡아도 6, 70명은 넘는 사람들이 나만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자리에서 처음 인사드리는 백현기 작가입니다. 온라인으로 얼굴 뵙던 분들을 직접 만나니 신기하고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가지셨으면 합니다.’
“아 참, 백현기 작가! 노래 잘하는데 노래 한 곡 하시죠!”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노래라니…. 분명 내 글을 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래를 시킬 리가…….’
예전에 공황장애를 앓은 적 있어서 약을 먹은 경험이 있다. 두 다리가 떨리고 한쪽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심각했다. 모르는 사람은 나보고 인상 쓴다고 하기도 했는데, 그게 나에게는 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극복했고 더 나아가보자고 다짐한 끝에 사인회에 나왔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노래는 어딜 가도 빠진다는 말 안 들었다. 혼자 코인 노래방에 가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른 적도 있을 정도다. 눈 질끈 감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한 곡 부르겠습니다.”
기계에서 반주가 나왔다. 노래 제목은 ‘막걸리 한잔’. 트로트 남자 가수가 부른 노래를 혼자 불러 노래방에서 100점 맞은 경험이 있어 선곡했다. 곡이 제목 그대로 찐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김승한 작가가 분위기 좋게 막걸리 한 통을 들고 와 왼손에 쥐여줬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하며 음악에 목소리를 올렸다.
오른손엔 마이크, 왼손엔 막걸리 한 병. 만약 전국 노래자랑에라도 나간다면 인기상을 노려볼 만도 할 모습이었다. 다행히 많은 작가가 호응해줬다.
임이랑 작가는 컵을 들고나와 진짜 막걸리를 받아 갔다. 나중에 다른 기승만 작가의 핸드폰에 찍혀있는 내 모습을 보니 무대를 정말 즐기고 있었다. 사람은 이름대로 살아가는 게 분명했다. 그때의 무대 덕분에 다음 달에도 또 오를 기대하고 있다. 시켜줄지는 모르겠지만.
20대 시절부터 열정 없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러다 삶에 커다란 벽 하나를 만났을 땐 몇 번 오르다가 힘들면 포기했다.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갔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다시 보니 그건 회피였다. 도망이었고, 듣기 좋은 핑계였다.
여름부터 직장에서 다른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에 속했다. 밀려드는 공문처리와 사람들을 하나씩 대면하다 보면 하루도 모자라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다들 그 일 맡기를 꺼렸다. 그런데도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이 또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직접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양한 업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일이 많을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날은 점심도 거를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끝이 나질 않았다. 복사기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퇴근은 늦어졌다. 그래도 웃었다.
퇴근하면 밤 열 시가 되어도 노트북을 켜 오늘 일기를 썼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삶도 살아볼수록 잘 산다. 일의 숙련도 또한 할수록 는다. 그게 고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번은 후배가 물었다. 일 하나만으로도 힘들 텐데 강연 준비, 책 쓰기, 독서, 운동을 어떻게 다 하느냐고.
특별한 비법은 없다. 하면 된다. 하루가 짧다고 느낄 정도로 시간을 보냈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낸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면 된다. 그게 내가 삶에 대하는 태도다.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내게 주어진 삶의 퍼즐을 하나씩 채워간다는 기분으로 일하고 글 쓴다. 그러니 너도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열정을 품어봐라.'라는 답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