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서점에 들른다. 인터넷에서 구매해도 되지만 시간을 들여 이곳까지 오는 이유가 있다. 내 손으로 책 등을 짚어가며 끌리는 제목을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특별한 제목 하나가 보였다. 30년 넘도록 정신분석의로 일하며 기록한 김혜남 작가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신 산다면.]이다. 22년간 파킨슨병을 앓고 있음에도 늘 유쾌하게 산다는 작가 소개에 감탄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원망만 가득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일이었다.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책날개 인용-
책날개의 마지막 문장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책을 골라 들고는 그대로 바닥에 앉아버렸다.
50여 년 전 그녀의 언니가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고 3 수험생 시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언니와 약속했던 의사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고 마침내 의대 입학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합격의 기쁨보다 마음속 허무함과 혼자 남았다는 공허함이 더 컸다고 했다. 축하해 줄 언니도, 할머니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 곁에서 힘을 준 사람이 사촌 오빠였다. ‘인생은 최선만이 아니라 차선도 있다, 그러니 끝까지 가봐야 하는 게 인생이야.’라는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살아야 할 인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학 생활을 치열하게 버텼고 당당히 의사 자격을 얻었다. 성적 또한 우수했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전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운명의 장난이 또 있을까. 이번엔 원하는 병원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당시 국립정신병원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한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속엔 오로지 분노와 원망 만이 가득 찼다.
살아보기 전엔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병원에서 그녀가 겪은 수년의 경험은 정신치료 법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후회와 원망 대신, 다음 순서의 문을 열겠다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은 행동의 결과였다. 만약 언니와 할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며 계속해서 방황했더라면, 원하는 전공의를 얻지 못했다고 원망했었더라면 지금의 김혜남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해서 인생이 실패했다거나 완전히 끝났다고 단정 짓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다른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게 맞을까?.’
그녀는 이 문제의 대답을 최선이 아닌 ‘차선’과 ‘끝’이라는 두 문장으로 찾을 수 있었다.
첫째. 삶의 방향이 어긋났다고 실패한 삶은 아니었다. 삶이 나에게 준 차선의 선택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과는 무궁무진해진다.
고 3 시절 나는 저자와 달리 진로 고민이 많았다. 앞으로 어떤 일 해야 할지 결정 못 했다.
때마침 전문대를 졸업하면 취업과 연계된 관련된 곳이 있다는 기사를 봤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었지만, 차선책으로 직업을 우선 선택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지만, 어느덧 나는 이곳에서 스무 번째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해외에서 ‘자동차 도색 일’을 하며 꿈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친구 B의 모습을 볼 때면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답답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몸부림친 날도 많았다.
올해 마흔이 된 지금은 어제의 내가 많은 겪은 몸부림을 모아 글을 쓴다. 이미 수년째 쓰고 있다. 처음엔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기 위해 한 줄, 한 줄 써놓던 일기장이 수필이 돼버렸다.
마음껏 여행 가지 못했던 아쉬움은 책이나, 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글감을 얻고 감상을 썼다. 목마른 사람이 물이 나오는 곳을 찾는다. 그동안 쌓인 글을 모아 공모전 몇 곳에 글을 투고해 성과를 얻었다. 상금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돈은 대부분 여행 경비로 사용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으니, 20년 전 내가 선택한 문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열린 문은 아니었나 싶다. 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은 신기하단다. 어떻게 직장 다니면서 글도 쓰고, 운동도 하는지. 하루 24시간이 나에게만큼은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고도 했다.
둘째. 목표를 얻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재능 문제를 탓하기도 하고 주변 환경을 원망하며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는 때도 많다.
2017년도 겨울, 꿈이 하나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막무가내로 책 쓰기 수업을 찾아다녔다. 방법을 몰라 무료 강의를 전전하며 자기 위로할 즈음 지금의 스승을 만났다. 하지만 수업료가 비쌌다. 포기할까 하다 1년 후 후회하고 있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돈을 모았다. 사고 싶은 물건의 수를 줄여가며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지금을 저축했다.
평생 제자가 된 나는, 매일 읽고 쓴다. 아직 자력으로 출간하지는 못했지만, 올해 봄 출판 플랫폼 중 하나인 ‘브런치 스토리’에 등단해 글을 연재 중이다. 그런 걸 보면 ‘끝’이라는 말은 ‘완전한 상태의 끝’의 아니라 ‘끝없이 노력할 것’을 의미하고 있을 터다. 김혜선 작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최고보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인생은 판에 박힌 되풀이와 놀라움이라는 이중구조’라고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말했다. 김혜선 작가는 차선의 선택에서 얻은 놀라운 경험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끈기가 있었기에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삶은 최선이 없다. 모두 같은 크기와 모양인 선택의 문일 뿐이다. 그걸 어떻게 열고 나아가는지는 오로지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간 문이 더 크고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끝에 무엇이 있을진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 눈앞에 닫힌 문을 쉬지 않고 열고 들어가 걸어가기를 반복할 뿐이다.
정말이지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인생이다. 내가 설마 작가를 꿈꾸는 40대 아저씨가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는 말이다. 다음 열릴 또 다른 문을 위해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