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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Sep 27. 2024

경험의 힘(2)

사고고사(事故故事)라는 말이 있다. 예기치 않은 고생한 경험이 나중에는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의미다.  순서만 바꾸었을 뿐인데, 겨우 네 글자 덕분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꾸만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막막한 하루였다. 총 5일동안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그 중 2틀째날부터 제주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총 3일을 계획한 트래킹 여정. 어젯밤 여행자 숙소에서 무한으로 제공하는 맥주를 마셔서인지 아침부터 속이 부글부글했다. 트래킹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장 난감한 일 중 하나가 길 한가운데에서 화장실 문제다. 분명 몇 분만 걸어가면 임시 화장실이 나올 것이라 안내되어 있었는데 보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스마트폰 배터리도 다 되었다. 큰맘 먹고 도전한 트래킹이었는데 불행의 연속이었다.


제주도 올레길이라고 하면 유명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걸었다. 실제로 걷다 외국인을 많이 만났다. 키가 크고 턱수염이 잔뜩인 남자도 봤고  하얀 피부의 백인 여성이 혼자 성인 남성 만한 크기의 배낭을 메고 걷는 것도 봤다. 시작점은 달랐지만 반대 편에서 걸어올 땐 서로 손을 들어 흔들며 파이팅을 건네기도 했다. 콩글리시 발음이지만 가슴 벅찼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배운 영어가 이때만큼은 한몫했으리라.


올레길은 거리로만 따지자면 총 437km다. 대부분 나무 그늘이 없는 해안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름에 걷는다는 건 불가능하고 울퉁불퉁한 길도 많아 쉬운 길은 아니다. 군복무 시절 산악행군으로 수 십 킬로짜리 군장을 맨 적 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고통이다.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도 한몫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올레길 7코스, 걷기 좋은 가을로 정했다. 이미 5번과 6번을 지난해 걸어본 적 있었기에 하루에 16km를 완주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출발한 시작은 오전 열한 시.  해가 지기 전까지는 넉넉했다. 올레길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다는 정보도 얻었겠다 마음 편하게 걷기로 했다.


인터넷은 분명 유익한 정보가 많다. 하지만 그만큼 주관적이거나 잘못된 정보다 많다. 경치가 좋은 건 맞았다. 하지만 그만큼 길이 험했다. 계곡을 지나 걸었고 도저히 길이 아닌 것 같은 밭 사이도 걸었다. 신발도 흙 투성이 된 지 오래다. 숨이 가쁘고 온몸은 땀으로 젖었다. 잡생각하지 않고 걷는 것에 집중했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귀에 들리는 건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와 옆에서 부딪히는 파도 소리뿐이었다.


처음 출발 했을 때보다 속도가 늦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힘겹게 걸어 바다에 더 가까이 닿으니 바로 앞에서 하늘과 바다가 터졌다. 쉬지 않고 피어내는 파도의 포말과 하늘 위 하얀 붓질을 남겨놓은 구름, 그리고 작은 항구까지. 법환포구였다. 몇 년 전 처음 방문했을 땐 밤에 도착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다른 곳으로 떠나는 바람에 자세히 보질 못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다. 아무리 남이 좋았다고 한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장소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하늘과 바다와 파도,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제주도라면 지도에 나와 있지 않더라도, 여행 블로그나 관광 홈페이지에 설명되어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상상가능하지 않겠는가.


글쓰기를 시작 한 이후 지금 겪는 모든 경험이 글감의 제1 재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땀 흘리면서 겪은 기억은 더 오래도록 남기에 글로 옮기기에 제일이다. 법환포구까지의 여정이 17년도의 기억이니, 7년 전의 기억인데도 어제일 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경험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당시에도 스마트폰을 수시로 열어 메모하거나 사진을 촬영했다. 지금의 기억을 최대한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도록 찰나의 번쩍임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글쓰기란 기억 속 한 장면을 끄집어내어 지금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처음으로 걸었던 이름 모를 바다의 모래에서 느껴지는 까슬함이라던가, 처음으로 만남과 이별을 겪었던 마음의 느낌, 오늘 오후 집 앞 세탁소에 다림질을 맡겼는데 서비스라며 공짜로 받은 행운의 감정까지. 이러한 구체적인 기억과 감정의 쌓인 경험이야 말로 글쓰기의 생생함을 더할 수 있다.


글쓰기는 나아가 잊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고민이 걷는 동안 해결되어 글로 옮겨놓았을 때, 세탁소에서 얻은 작은 선의에 기쁨을 글로 적었을 때에도 나는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모든 경험을 솔직하게 글에 옮겨야 한다. 글 쓰는 것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을 겪었다고 해서 분노, 원망을 느꼈을 수는 있어도 매 순간 그렇지만은 않았을 터다. 사랑하며 나누었던 감정도 있는 그대로 적고, 아쉬운 순간도 적을 줄 알아야 한다. 열심히 목표를 정해두고 노력했음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고개 숙이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것 역시 일련의 결과일 뿐 내 감정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 모든 글은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하는 해명이 될 수 있을 테니.


지금까지 예상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글쓰기를 배웠더라면 경험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데에 더 집중했을 터인데 그 점이 아쉽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연재하고 난 후부터는 여럿 작가들의 글을 읽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알아보기 힘든 문장, 유명한 명언보다 자신이 겪은 일상에서의 경험을 하나 둘 풀어내는 이야기가 인기가 많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인기 많은 작가는 덤덤하게 자신의 기억을 옮겨 적을 뿐이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인데도 수 백편의 글을 써낸다. 분명 작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글쓰기의 고통을 참아내며 노트북 앞에 앉는 것이고.


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안에서 자신의 앞에 놓인 항로 하나를 발견할 있었으면 좋겠다. 땀냄새 가득한 경험은 시대와 나이 불문하고 흥분되는 감정일 테니까.


포구 안쪽에 있는 여행자 숙소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어느새 하늘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배 줄을 매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숙소에서부터 들고 나온 캔 커피 한 개를 바닥에 내려놨다. 올려다본 하늘은 어느새 더 짙게 변해 있었다. 매일 보았던 하늘이었을 텐데 오늘 만큼은 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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