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살의 여름엔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 기억나는 내용은 없었다. 단순히 읽기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알코올 치료센터와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을 억지로라도 끊어야 하는 시기였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까지의 중독을 끊어낼 수 있는 다른 무언가의 긍정적인 중독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의사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시작한 일이 독서였다.
평소 책을 읽지 않던 나에게 독서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몸은 책 앞에 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운동해 볼까.? 이 책을 읽는다고 내 인생이 변하기는 할까?. 어느 순간부터 마음엔 독서에 대한 불신만 가득 찼다. 몇 페이지 읽다가 책을 덮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 나에게 기적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지역의 독서 모임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퇴근길에 집 앞 마트 입구에서 동네 소식 알림판을 유심히 봤는데, 때마침 독서 모임에 참석할 인원을 구한다는 홍보문을 본 덕분이었다.
안내된 연락처에 문자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도 독서 모임에 참가하고 싶어서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모임 이름은 ‘1주 1 책’. 일주일 동안 지정된 책 한 권을 읽고 참여하면 됐다. 일주일에 책 한 권을 다 읽어야 한다고.? 가능하기는 할까?'
비결이 있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 제목과 목차, 저자의 에필로그를 읽고 '내가 작가라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내 생각을 글로 옮겨보는 것이었다. 몇 줄이든, 몇 장이든 상관없었다. 쓰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과정은 마치 책의 저자와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 같았다.
점심시간마다 책을 들어 사무실을 나섰다. 나무 그늘 밑 등 없는 의자에 앉아 이번 주 모임에 선정된 책을 읽었다.
제목은 [살아갈 날들의 인생 공부. 레슬리 가너 지음]였다. 30년 동안 독서 평론가로 지내며 남겨놓은 수많은 메모와 기사를 엮어 만든 책이었다. 살면서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그때마다 꾸역꾸역 버티자 어떻게든 살아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 책을 두고 자신만의 맞춤형 응급 약상자라고 표현했다.
응급 약상자라… 그럼 나는, ‘인생의 오답 노트'라고 제목을 붙여 볼까?. 실패라고 생각한 일들이 더 많으니, 다시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지금 잘살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위로해 보는 건 어떨까?
처음엔 한 줄 쓰고 난 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지만 잘 쓰려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랬어요'라고 생각하자 손은 빨라지고 점심시간은 짧아졌다.
쓰기는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을 단순화시켜 줬다. 또한, 당면한 문제해결의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고,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생각도 깊어졌다.
모임에 참여할수록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에는 무작정 읽기 바빴지만,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늘 새로운 만남에 상상력은 늘어갔다.
나아가 사람들과 대화 중에는 미소를 잃지 않는 방법도 배웠다. 그런 의미로 독서 모임은 나의 중독을 치료하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든 만병통치약이 됐다.
독서 모임은 스스로 작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혼자 읽고 덮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책으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더 깊이 있게 읽어야 했다.
자기 성찰과 동시에 남을 위한 봉사이기도 했다. 시한부 인생을 통보받은 저자의 이야기를 읽었을 땐, ‘내가 작가와 같은 상황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통해 마음이 커지고,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의 눈물 나는 소감에는 조용히 휴지를 건네주기도 했다.
이 모든 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남을 위한 이타심까지 발휘하니, 독서 모임은 봉사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 모임은 문을 닫았다. 고정회원이었던 대학생들은 졸업해서는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갔고 누구는 직장을 옮기느라 떠났다. 나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하려 했지만, 점차 힘에 부쳤다.
매주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다. 단순히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생각을 정리까지 해야 했으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든 독서였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모두 글로 남겼다. 나만의 인생의 오답 노트라고 이름 지었으니,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모임에 참여하지 않지만, 독서와 글쓰기는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 읽은 책 목록을 정리하고 독후감으로 남긴다.
글의 마지막에는 어떤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지금, 이 순간 글로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지은 어록까지 써넣는다.
매일 독서와 쓰기를 하면서 배운 점이 있다. 처음엔 불안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해결이 되더라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그때마다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 독서를 통해 앞에 놓인 오답 선택지를 지우는 중이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에릭 호퍼는 죽는 순간까지의 삶을 길 위에서 보냈다고 했다. 그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을 개인의 철학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그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매일 읽고 쓰자 세상이 변했다. 사실은 세상은 그대로였고 내가 바뀐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내 삶의 태도를 바꾸었으니 그만하면 되었지. 나만의 오답 노트가 한 장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