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을 내 삶의 이방인으로 살았다. 다음엔 5년을 독자로 살며 그중 절반은 작가로 살아왔다. 퇴근 후 도서관과 카페, 독서실에서 책을 꺼내어 무슨 전공 서적을 탐독이라도 하듯 읽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해 곁눈질로 옆을 둘러보면 딱 봐도 어려운 영어, 수학 공식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열정 넘치는 공간에서 혼자 책을 읽었다. 어떨 땐 하루에 한 권을 다 읽은 적도 있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카페 직원이 ‘죄송합니다 마감해야 돼서요.’라는 말에 고개를 든 적 있다.
그만큼 책에 미쳐 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에 쓰인 글이 아니라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작가의 말에 마음을 빼앗겼다. 누가 들으면 배꼽 빠지는 개그 이야기인 줄 안다. 대부분 사람이야기였다.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을 무덤덤 적어놓은 작가의 일상.
그 속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들판의 꽃도 흔들릴지언정 꽃을 피우는데 온 힘을 다하는데 사람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 라든가 ‘죽음 밖에는 보이지 않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던 점은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으면 어떤 어려움이든 이겨낼 용기가 있다’는 등의 문장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서 살아온 삶과 독자 · 작가를 흉내 내고 있는 한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라는 제목처럼 책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살아온 내 뒤통수를 깨뜨리는데 한 몫했다. 워낙 고집이 세 주변에서 ‘그거 아니야’라고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내가 책 한 권 완독 하면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했다.
짜증과 실망이 번갈아 생기는 날 책을 읽다가 마음을 깨뜨리는 문장 하나를 만나면 스스로 치유가 됐다. 사실 술을 마시면 단번에 해결될 일이다.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도 책을 선택했다. 술에게 받는 위로는 쉬웠고 그만큼 금세 잊혔다. 그러나 책은 달랐다. 한잔의 술처럼 털어낼 수도 없고, 천천히 한 줄 읽고 고민하고 한 페이지를 읽으면 하루를 돌아봐야 했다. 자연스럽게 마음은 가라앉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반성할 줄 아는 내가 됐다.
만약 세상에 글 쓰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다. 인류의 발전은 모두 과거로부터 시작되었지 않는가. 발가벗고 돌멩이를 던지며 사냥하는 존재에서 어떤 곳이 위험하다는 걸 기록하며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기록하여 남겼다. 이 과정이 작가의 일이었다.
만약 내가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내 삶의 이방인으로 구경만 하고 있을 터다. 그러다 남이 이루어 놓은 성과에 침 흘리며 ‘나는 왜 못하는 걸까?’ 시샘과 질투만 가득 남겨두었을 지도. 여러 책을 읽었다. 개인의 이야기, 위인전, 여행기, 주식, 부동산 투자 등 등. 읽을수록 느낄 수 있었던 건 나 스스로가 진화하기 위해 선택한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선물 받은 책과 서평을 써 줘야 할 책이 집 거실에 한 가득이다. 퇴근하면 늘 읽어야지 하면서도 속도가 나질 않는 이유는 작가가 남긴 한 페이지를 눈으로 대충 읽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한 문장을 완성할 때마다 그가 번갈아 느꼈던 고통과 희열이 나에게도 느껴진다.
한 번은 누가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요즘 같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굳이 오랜 시간을 들여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해 안 된다고 했다.
첫째. 독서는 무료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빠른 속도가 전부가 아니다. 정확하고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만 정보다. 종종 인터넷 검색창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검색하면 관련 정보가 끝없이 제공된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제목에 이끌려 영상이라도 클릭하는 순간 수초에서 몇 십 초의 버퍼링이 생긴다. 광고다.
광고를 다 봐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소액의 금액을 지불하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무료 정보가 아니다. 또한 아무리 정리가 잘되어 있더라도 핵심사항은 다시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영상을 볼 땐 눈과 귀가 즐겁고 몸은 편하다. 정보는 몸이 힘들어야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고 나만의 지식으로 재 가공 할 수도 있다. 인류 역사를 동굴 벽에 그려놨기 때문에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이다.
둘째. 그동안 알 속에 있느라 몰랐던 다른 세상을 알 수 있다. 완독 수량이 늘었다. 그만큼 경험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스마트폰 영상으로 세어보면 아마 수 십, 수백 만 편 이상을 봐야 했을 양이다. 경험이 많다는 건 낯선 환경에 나를 노출시켰다는 의미다.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도 이미 직간접적으로 겪어본 일이므로 당황할 확률이 적어진다.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뒷걸음치기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걸어갈 줄 안다. 내년이면 지금 직장을 다닌 지 20년 차다. 중간에 그만 둘 생각도 많이 했다. 이직을 꿈꿨다. 다른 일을 하기만 하면 삶은 늘 순탄하리라 생각했다. 고향 후배를 따라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해볼까 했다. 친구를 따라 화물 운송업을 해볼까 했다. 선배의 추천으로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가리키는 일을 해볼까 했다.
그때마다 관련 업종과 관련된 도서를 찾아 읽었다. 정확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모두 하고 있는 일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지금 내가 하는 일과 비교해 봤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보람찬 경우도 많았다. 내가 안내를 해주어 자신의 고민이 잘 해결되었다는 감사 전화를 받았을 때라던가, 친절한 답변을 받았다던가 하는 순간 들었다. 책과 가까이 지내면서 내가 낯선 사람과도 대화를 잘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대화하는 법’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적응력을 높여갔다. 사람들은 모른다. 오늘의 내 모습은 어제의 내가 노력으로 이루어낸 성과라는 것을..
셋째. 내 삶의 안전장치다. 책 자체만으로 내 삶이 변화했다고는 할 수없다. 읽고 난 뒤가 중요했다. 덮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나를 생각했다. 어리숙한 삶 대신 조금이라도 성장을 꿈꾸며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무작정 바쁜 하루에 끌려가기보다는 몇 분이라도 중간중간 책을 편다. 읽으면서 업무의 중요도, 나아가 내 삶 까지지도 재 점검하는 기회가 된다.
업무의 기획안을 쓸 때에도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므로 지금까지의 일 대신 책을 읽는다. 닫힌 뇌를 열어 수만 가지 아이디어를 녹여내는 하나의 방법인셈이다. 5년 동안 매일을 붙어 다니던 책, 아니 작가들이 많다. 독서노르틀 저기고 시작한 뒤부터 읽은 책에 번호를 적었는데 24년 10월 21일 기준 488권째다. 수 백명의 작가들이 옆에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것 같으면 잔소리를 하고, 궁금한 점 있을 땐 조언을 해줬다. 그러니 엉뚱한 길로 새는 걸 막아 줄 수밖에.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는 말이 있다. 논어의 술이편에 나온다. 앞에 세 명이 길을 걸어가면 그중에 내 스승이 반드시 있다는 말이다. 사람만이 스승이 되는 건 아니다. 책도 될 수 있고 음악이나, 그림이 될 수 있다. 내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든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작가 빅터 프랭클, [길 위의 철학자] 에릭호퍼는 이미 세상에 없으니 그 뒤를 볼 수는 없으니 그들이 남긴 책을 보고 배울 수밖에.
두 사람다 철학자는 아니었으나 직접 겪은 일이 많다 보니 스스로 깨달은 바가 많았다. 빅터는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에릭호퍼는 미국에서 노동자의 비애를 겪었다. 그들이 남겨놓은 책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배움을 하고 있으니 두 사람만큼은 책 자체가 스승이다.
쓰면서 자주 돌아본다. 20대 에는 앞만 보고 달렸다. 성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눈앞의 성과를 하나 이루면 그게 성공인 줄 알았다. 그러다 큰 벽을 하나 만나면 포기하고 술로 위로를 받았다. 지금은 책을 읽고, 쓰면서 내가 나를 위로할 줄 안다. 앞으로도 많은 반추의 시간을 가질 줄 아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알을 쪼아대기를! 나의 글이 누군가의 어미새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