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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든기억 깨우기 Jun 28. 2021

문방구의 잠든기억





동네에 잘 가던 문방구가 하나 있다. 걸어가면 10분 이내에 대형할인 문구점이 두 개나 있지만, 동네에 살면서 할아버지가 주인인 작은 문방구가 나에겐 단골이다. 오후가 되면 출입문 양옆에 땅부터 1층 전체를 차지하는 커다란 유리창으로 햇빛이 스미고 길 가장자리에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 잎이 초록 커튼처럼 어른거려 걸터앉아 계시는 할아버지의 몸 전체에 생기를 넣어주는 문방구다. 햇빛이 문방구에 스미면 책 속에 숨어있던 뽀얀 먼지와 함께 문구점의 스케치북이며 펜들 사이사이에서 퍼져나오는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의 그림이 영화속 필름처럼 돌아간다.     


며칠 전 출근길에 문구점이 문을 닫았다. 특별한 일 없으면 일요일도 늦게까지 불을 켜고 손님을 기다리던 문방구가 오늘은 문을 닫았다. 주인 할아버지가 아프신 것인지 코로나로 장사가 안돼서 쉬시는지 궁금했다. 오늘 출근길엔 문구점 커다란 유리창이 떨어져 나갔고 바깥바람이 문구점 안을 휘몰고 지나간 자리엔 ‘대대적 내부공사로 인한 휴점’이란 현수막이 할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개로 쓱쓱 지우듯 휘젓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 문구점을 크게 확장하시는 거면 다행인데 몸이 안 좋아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신 것인지 자식들이 물려받아 제대로 문구점을 하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가 앞으론 안 보이실 거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문방구가 좋은 이유는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초등학교가 아닌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순간으로 엘리스가 들어가듯 밖에 세상은 잊히고 지우개며 새로 들어온 볼펜과 연필에 손이 가고 사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매끄럽게 잘 싸지고 얄팍하게 잡히는 세련된 펜보다는 칼로 정성스레 깎아 사각사각 소리가 나서 거칠지만 숨은 감성까지 풀어주는 연필이 사고 싶어진다. 늦게까지 문을 열어주시니 갑자기 급한 물건이 떨어져 사러 가도 구세주처럼 할아버지는 필요한 문구를 주시니 늘 고마워하던 집이다. 볼펜 하나 사러 갔다가도 도톰한 수첩도 하나, 둥 둥글둥글한 지우개도 하나, 말랑말랑한 젤리도 하나 사 오는 곳인데 없어졌으니 잘 가던 길 한가운데 싱크홀처럼 가슴 한편이 생뚱맞게 허전하다.     

요즘은 엄마들이 아이들 준비물이나 학습재료를 사러 갈 때 동네 문방구보다는 대형할인점을 많이 간다. 가격도 싸고 예쁘게 만들어져 있어 아이들이 선호하는 물건도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교 앞 문방구는 아이들 준비물로 간신히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 어릴 적 학교 앞 문방구는 모든 소문의 근원지이고 오락실과 분식점을 갖춘 대형 쇼핑몰 같은 존재였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으면 만나는 약속장소였고 만나서 놀러 갈 때는 가방도 맡아주는 대여소였다. 숙제나 준비물을 적은 수첩이 있어 버렸을 때도 문방구 아저씨는 마술사처럼 우리의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주셨다.     





문방구가 어느 순간 없어졌다. 문방구에서 팔던 떡볶이와 쭈그리고 앉아 서너 명이 머리를 맞대면 화면조차 보이지 않던 오락기계도 없어졌다. 사각사각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샤파연필깍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없어질수록 진하게 머릿속에 기억되던 동네 문방구가 그립다. 살면서 급하고 아쉬울 때 속 시원히 해결해주는 문방구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에겐 그리웠을는지 모른다. 말랑말랑하고 커다란 점보지우개로 잘못된 글씨를 쓱쓱 지워내 듯 속 시원한 지우개가 필요했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멋지게 매력적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4B연필 같은 굵고 진한 연필이 피곤하면 갑자기 찾는 비타민처럼 나에겐 필요했을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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