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담글방 Jun 16. 2023

[밀양 한달살기를 마치며] 여행의 이유

일상이 좋았다면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양에서 한달살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


자려고 누웠는데 귓가에 풀벌레와 새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환청처럼.


기억의 소리를 떨쳐내자 고요한 아파트의 밤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은고택




누군가 내게 왜 자꾸 떠나냐고 묻는다면, 일상이 견디기 힘들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어?라는 질문에는 한 마디로 정리된 답을 내놓기 어려우리라. 예쁜 사진과 여행기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나의 상황과 마음이 있다.


다른 사람의 '여행의 이유'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저 그곳에 가고 싶어서, 안 해봤던 도전을 하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어서, 친구나 가족과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혹은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거창한 바람을 안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일상이 견디기 힘들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이 사람들 속에서 삶을 바꾸기 어려우 내가 머무는 공간과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떠난다.


다만 단 한 번도, 그 어떤 여행도 후회한 적이 없다. 별로인 여행은 그거대로, 좋았던 여행은 오랜 추억이 되어 남는다. 내게 여행은 좋으려고만 가는 게 아니다. 그래도 늘, 일상과 다른 설렘과 기대를 갖고 떠나곤 했다.


  




한 번 숙소에 들어가면 큰 결심을 해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내가, 좀처럼 움직이는 건 싫어하는 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는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혼 전에도 무언가 삶이 막막하다 느껴질 때, 답을 찾고 싶을 때 떠나곤 했다. 훌쩍, 아무 생각 없이 떠나는 것 같지만 늘 어떤 부담감을 지닌 채 비행기에 올랐던 것 같다. 내가 여행을 가기 위해 버려야 했던 기회비용을 무겁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 경력, 혼자 떠나는 여행의 위험 등등 가볍지만은 않았다. 경제적인 얘기를 해보자면 여행경비로 쓰는 돈이 100만 원이라고 했을 때, 내가 여행 가 있는 동안 벌지 못하는 수익은 대부분 그보다 많았다.


프리랜서 방송작가라 떠남이 쉽다고 해도 돌아왔을 때 누가 나를 고용해 줄지 알지 못했다. 돌아올 곳이 정해진 채 여행을 떠난 적은 없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부담을 안고 떠나다 보니 자꾸 여행에 가서 무언가를 남겨오고 싶어 했다.     


비우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됐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내게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떠남에 있다.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고 결국 떠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 부담을 지우지 말자, 밀양에 있는 동안 되뇌었던 다짐이다.






밀양 여행에서 얻은 것이 참 많다. 글도 많이 못 쓰고 일도 별로 못 지만 얻은 것에 먼저 감사하고 싶다.     


밀양의 한적한 시골마을, 한옥 고택들과 오래된 돌담이 있는 퇴로마을은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낯선 기분을 들게 했다. 


게다가 일상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고택에서의 시간은 지친 몸과 마음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소은고택 사장님께서 챙겨주신 매실청과 다육이 화분과 수국


보통 다른 한옥마을이나 문화재 고택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해도 들어가지 마시오, 이런 문구 탓에 한 발 물러서야 했는데 이곳은 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면서도 직접 머물 수 있게 지난 4월부터 개방한 공간이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마당에는 감나무 앵두나무 보리수나무 매실나무 등등이 있고 수국이며 낮달맞이꽃 등 이런저런 풀과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다.


마당과 툇마루를 오고 가는 고양이들도 반가웠고 30도를 치솟는 더위에도 사랑채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고 시원했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탑니다) 


물론 가끔씩 밖에서 유입된 벌레들과의 조우는 불편하고 아파트나 호텔 같은 편리함은 부족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처음 지내보는 한옥 스테이의 장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은고택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이라 운치가 좋고 쨍한 날은 마당이 더욱 푸릇푸릇하게 살아나며 붉은 앵두와 꽃들이 비현실적으로 환하게 빛을 뿜어냈다. 아궁이에서 장작도 태우고 감자도 구워 먹고 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숙소에 누워있으면 어디 안 나가고 싶어지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일까. 


퇴로마을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머무는 내내 질리지 않아 굳이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한낮에도 밤에도, 시간과 날씨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모습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오래된 한옥들, 새로 지은 서양식 집들 사이로 논과 밭이 있다. 옛것과 새것이 뒤섞여 있지만 오랜 정서를 품고 있는 낮은 돌담은 걸을 때마다 정겨웠다.     


퇴로마을


숙소 가까운 곳에 맛있는 식당과 카페가 있어 좋았다.

특히 은고택 도보 거리에 있는 퇴로정이라는 한옥카페에 자주 갔다.


차로 3~4분 거리에는 가산저수지가 보이는 대형 카페도 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오랜 수다를 떨었다. 지인들이 없는 날에는 주로 숙소와 마을을 돌며 지냈다.     






그 와중에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오래 속을 썩이던 집을 매도했고, 한 달 살기 에세이를 몇 꼭지 썼고, sns에 하루 2건의 숙제를 꾸준히 올렸다.


완독은 아니지만 24권의 책을 읽었다.


고성에서 시작한 30초 플랭크와 한 줄 쓰기, 한 줄 읽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양산 카페 <카페볼라>


밀양에 간 덕분에 첫 프로그램에서 만나 21년지기 절친이 됐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양산 친구도 만났다. 코로나 기간이 길기도 했고 통화를 자주 해서 어제 본 듯한 친구였는데도 얼굴을 보니 눈물이 쏟아진다.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얼굴 한 번 못 보고 살았을까. 그동안 이런저런 마음 고생이 심했던 친구의 얼굴은 많이 까칠했다.


회사 이전으로 부산에 내려간 지 몇 년 된 친한 동생도 일 년 만에 만났다.  동생에게는 내가 어려운 시기에 큰 도움을 받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얼굴 보고 밥 한끼 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 이유가 뭐였을까.


밀양에서는 그런 좋은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더 특별했다. 사랑채 독채를 썼는데 방이 2개였기에 가능했다. 명의 후배와 한 명의 선배가 왔고 아이 친구 어머니와도 하루하루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다른 지자체 한달살기에 선정됐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강진은 탈락!)


창원 한달살기는 지금 2차 참가자를 모집중입니다!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는 방학인 아이와 함께 창원을, 9월에는 혼자 해남에 간다. 10월에는 아이 가을 방학이 있어서 한 곳 정도 더 지원해 볼 생각이다.

아이는 작년 여름, 가을 방학 때 고성에서 보낸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그런지 엄마와 가는 창원 여행에 벌써부터 기대감을 보인다.


이 지자체 한달살기 경험들을 모아 전자책도 출간하려고 한다.


지자체 한달살기는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평소 생각하기 어려운 지방소멸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했다. 지역을 알리려는 지자체들의 노력도 절실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여행하는 동안 지역의 장점을 많이 알리고 싶었다. 나의 느린 여행에 공감해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다행이다.


아 참, 밀양 한달살기 글이 다음 메인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지자체 지원을 받아 떠나온 한달살기는 전에 가보지 않았던 지역에 대한 관심을 줬고 기대 이상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창원과 해남 한달살기도 기대가 된다. 아마 지역마다 경험하는 것도 다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겐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해결 과제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여행이라 마음이 무거운 부분도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영영 못 떠날 수 있으니 일단 고!를 외쳐본다.


방송을 하지 않은 지 1년이 넘었고 그 사이 수익은 바닥을 찍다 못해 마이너스를 향해 갔지만 이전에 안 해본 일들을 하는 게 의미가 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이전과는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까, 즐거운 기대를 하는 중이다.






김해 한달살기 후 밀양에 며칠 머물다간 후배가 유튜브에 밀양에서의 일상을 올렸다.


산티아고 여행 에세이를 쓰고 있는 후배는 자신이 하던 많은 일을 하나 둘 정리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후배는 지금 제주도에 있다. 재택이 가능한 방송 프로그램을 하는 덕분에, 비록 하루종일 방송에 매여있긴 해도 몸은 자유롭게 떠돌 수 있다. 8월에는 또 다른 곳에서 2주 살기를 하고, 9월에는 혼자 50일 해외여행을 떠난다.


후배의 떠남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걸음 수만큼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후배가 정한 산티아고 여행에세이 제목이다.


여행을 통해 무언가 찾고 싶은 것이든

스스로 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이든

단지 좋아서 떠나는 것이든,


그게 무엇이든 네 발걸음을 응원해. 


https://youtu.be/pu55EosH9Mw



밀양 고택에서의 일상이 궁금하신 분들은  유튜브<잡도린>에 한 번 놀러 가 보세요~!(전지적 후배시점. 저는 목소리 출연만 살짝 했습니다) 후배의 영상을 보며 나도 어서 영상편집을 배워야지!

의지를 불끈 다져봅니다.

        

이전 05화 밀양 한 달 살기 중입니다(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