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연수 갈 지역을 정할 때 처음 고려했던 곳은 스코틀랜드였다. 지인이 살고 있어 집을 구하는 것부터 정착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다.
보통 날의 영국 트라팔가 광장. 흐리다. copyright 백작가 스코틀랜드 행은 막판에 포기했다.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날씨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안 좋기로 유명한 영국 날씨 중에서도 북부 지방 날씨는 정말 악명 높았다.
일 년 중 춥고 바람이 거세 야외 활동을 못하는 달이 많다. 심지어 백야가 있는 곳도 있다. 해를 볼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된단다. 가족과 함께 재충전하고, 유럽 생활의 매력을 느껴보고자 떠나는 건데 일년 중 컴컴한 날이 대부분이라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한 곳이 영국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 플리머스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파견 근무까지 한 선배가 “런던 아래 지방으로 가야 기후가 좋다”고 조언한 영향이 컸다. 2월에 도착한 후 한 동안은 날씨가 맑고 좋았다. 무엇보다 공기가 좋아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영국 날씨의 진면목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월세 집에 입주하고 가구를 사기 전 며칠 동안은 카페트 바닥에서 자야했다. 너무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
집 자체가 오래 되어 단열이 안되고, 라디에이터로만 난방을 하기 때문에 찬 바닥에 이불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집 안에서도 카페트를 깔았다고는 하지만 바닥에서 습기를 머금은 찬 냉기가 올라왔다. 결국 급하게 매트리스를 샀다. 라디에이터로는 감당이 안되는 웃풍을 견디기 위해서 텐트를 사서 침실에 치고 잤다. 그러니 좀 살만 했다.
영국 남부의 겨울 기온 자체는 한국보다 높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다. 한국 날씨와 가장 큰 차이점은 습기다.
여름에 습기가 많은 한국과는 달리, 영국은 겨울이 춥고 습하다. 게다가 바람이 많이 분다. 한번 상상해보시길......
을씨년스런 흐린 날씨 하늘을 배경으로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람을 맞는 느낌을....
집사람은 영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라디에이터와 사랑에 빠졌다. 아무리 세게 틀어도 뜻뜻 미지근 했지만 비실비실한 온기가 있는 쇠붙이가 뭐가 그리 좋은 지 하루종일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주로 장마철 실내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과는 달리, 영국은 겨울철에 곰팡이가 생긴다. 겨울에는 걸레로 벽을 자주 닦아줘야 한다.
또 한가지 영국 날씨의 특징은 겨울철 해가 짧다는 것이다. 오후 4시경이면 깜깜해진다. 아침엔 7시 30분이 넘어야 해가 뜬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머금은 찬 바람이 부는 데다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날씨 때문에 영국인들은 가정적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가족과 화목하지 않으면 긴긴 겨울밤이 고통 그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은 여름이다. 보통 5월 중순이나 말부터 9월초 정도까지. 이웃들을 보니 소유한 고정식 캐라반(차량형 캠핑 숙소)으로 주말마다 시간을 보내러 간다. 이때는 해가 새벽 일찍 떠서 밤 8~9시경까지 안 진다.
날씨 좋은 여름 주말 낮이면 동네에 우리 가족만 있을 정도. 여름이라고 해도 기온이 그리 높지 않다. 남부 지방이었지만, 영국에 있던 2년간 선풍기를 한 번도 틀지 않았다.
플리머스도 좋지만 바로 옆 콘월은 영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해변 휴양지다. 우리도 영국 친구가 카라반을 빌려줘서 놀러 갔었다. 짐을 풀고 해변으로 향했으나 수영복만 입고 바닷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그리 덥지 않은 날씨고, 대서양의 바닷물은 차기 때문이다. 영국인들도 웻 수트라고 잠수부들이 입는 고무 옷을 입은 이들도 있을 정도다.
처음 생활할 때는 바뀐 기후에 적응하느라 애썼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영국 날씨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지 않다.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 겨울에도 매장에 거위털 파카 등 방한용 옷은 많지 않고, 대신 방수가 되는 기능성 옷이 인기다.
해가 짧고, 비가 자주 오는 변덕스런 날씨는 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런 날씨도 장점으로 작용한다.
무지개 뜬 영국 동네 풍경. 비가 많이 와서 무지개도 자주 뜬다. copyright 백작가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이 강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영국은 사회 분위기상 공공장소에서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어두워지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이 시기에 꽤 가정적인 아빠가 되었던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보드게임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바쁘다는 핑계로 잘 몰랐던 아이들의 많은 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안 좋은 겨울 날씨가 가져다 준 소중한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온 후 빛의 속도로 리셋되긴 했지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