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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Mar 06. 2021

<비포 위 고>

잠들기 힘든 밤에 보기 좋은 영화

어쩌다 인생 최악의 밤이 최고의 밤이 되었을까요?
출처: 영화 <비포 위 고>

이 영화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새벽, 그러니까 몸은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곧바로 잠들고 싶진 않고, 딱히 무언가를 먹고 싶지도 않을 때, 이따금씩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사소한 고민들이 있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지만 혼자 있고 싶은 그런 날 밤에 보기 딱 좋은 영화다. <비포 위 고>는 우리에게 ‘캡틴 아메리카’로 잘 알려진 크리스 에반스가 주연 및 감독한 영화로 막차가 떠나가고 아침이 오기까지 정처 없이 뉴욕 거리를 헤매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늦은 밤의 그랜드 센트럴 역. 그곳에서 내일 오디션을 앞둔 재즈 트렘펫 연주자 닉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음악을 연주한다. 그러다 기차를 놓치고, 가방까지 잃어버려 오갈 데 없는 상황에 놓인 브룩이라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녀를 도와줄 겸 함께 새벽 거리를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게 된다.


<비포 위 고>는 자신이 놓치고 만 기차를 떠나보내고 다시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닉은 6년째 전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하고 살고 있었고, 그녀가 있는 뉴욕에 온다는 것조차 자신의 꿈을 빌려 핑계를 댄다. 브룩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이후 선전포고를 날린 편지를 집에 남겨 두고서 홧김에 뉴욕으로 와버렸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지를 다시 거두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남편이 그 편지를 제 손으로 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지 갈등하고 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영웅이 되어주면서 번갈아 가며 서로를 도와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사연에 닿는다.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용기를 내어 전 여자 친구와 재회해보라는 조언도 예상치 못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돈을 벌 계획으로 펼친 요상한 게릴라 무대도 쫓기듯 아무 소득 없이 끝나버렸고, 편지를 거두기 위해 용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도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게 제자리다. 하지만 마지막에 헤어질 때의 두 사람의 모습은 만남 직후의 모습과는 어쩐지 달라 보인다. 하룻밤 사이 그들의 마음엔 어떤 별들이 들어찼을까.


닉과 브룩 모두 자신의 사랑이 떠나간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그들의 만남의 의미는 그저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데에만 멈춰있지 않다. Before we go. 우리가 어디론가로 떠나기 전에는 헤매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떠나간 것들을 정리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준비를 하는 시간. 이 영화는 바로 그 시간들에 대해 말한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과 각자의 사연이 차차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롭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소 진부한 사연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가 그런 이야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오랜 밤을 지새우는 두 사람을 따라 우리도 나란히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특별한 사연이라서라기 보단 이게 바로 당신의 사연이라서 더 와 닿는다. 자극적이고 복잡한 스토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는 이런 진짜 이야기를 봐야 한다. 진짜 이야기는 멋들어지게 빈 공간을 채우는 그림이 아니라 그 뒷면에 있다. 완벽하지도 않고 찌질하기도 하고 그런대로 살아가는 우리. 하지만 우스운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고, 다시 사랑이란 걸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다시 시작을 해보려는 우리들의 이야기 말이다.

 

집으로 가지 않고 밖에서 밤을 지새워본 경험이 있다면 저들의 밤이 어떨지 감이 온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 가끔 마주치는 한적한 거리와 골목길의 서늘함. 몽롱한 기분. 아무 말이나 하고 아무렇게나 시시덕거리다가 또 어느 순간 마음이 울적해지는 그런 밤들. 어찌 보면 단순하고 당연한 말들을 하는 뻔한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그 흔한 사랑이 어려운 게 사람이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효성 있는 어떤 조언이 아니라 이 밤을 함께 지새워 줄 다정한 사람이 아닌가.



덧. 공중전화기에 대고 타임머신 놀이를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의 장르는 SF가 아니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미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에게 맞닿아 있다. 반쯤 꿈꾸고 있는 듯한 몽롱한 기분에 어떤 시시한 농담도 다 용서가 되는 밤이다. 운명이란 환상을 믿어보게 하는 그런 밤.


평점: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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