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극을 보는 이유는
드림플레이 김재엽 연출의 연극을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새롭게 알게 되거나 깨달은 걸 주저 없이, 그러나 집요한 리서치와 스터디를 거쳐 연극으로 형상화하는 부지런한 크리에이터입니다. '케이멘즈 랩소디'나 '자본 시리즈'를 보면 그가 페미니즘이나 타자화, 대상화 등 사회·역사적 이슈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한국 현대사에서 잊혀 간 조선의용대 이야기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해로 가서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활약하다 일본 나가사키 감옥에서 정치범 신분으로 갖은 고생한 한 뒤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문필가의 길을 걸었던 김학철이라는 인물의 일대기입니다(러닝타임이 인터미션 포함 185분인데도 겨우 1부가 끝났을 뿐입니다).
이 연극은 2019년 아르코 예술창작실험활동이 일환이었습니다. 정확한 고증과 스터디를 위해 중국은 연길-북경-석가장-태항산-호가장을, 일본은 나가사키-이사하야-도쿄를 리서치했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5년 만에 비로소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고 하니 그 열정과 집념이 대단합니다. 게다가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은 또 어떻고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모두 다룬 다큐멘터리 연극인 만큼 소년부터 노년까지 세 배우가 김학철 역을 맡았는데 남명렬, 김세환, 김시유라는 명배우들이 출연합니다. 특히 노년의 김학철 역을 맡은 남명렬 배우는 그 당시는 물론 다른 시간대까지 아우르는 '메타인지' 캐릭터로 극의 흐름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김재엽 연출의 작품에서 늘 볼 수 있는 백운철, 서정식, 이갑선, 이다혜, 이소영, 이태하, 장찬호, 정유미 배우 들이 출연해 일인다역을 소화했고요. 로비에서 만난 김재엽 연출은 "이번 연극은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한 곳에 모두 모아서 함께 한다는 즐거움 또한 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부가 끝나고 잠깐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객석 뒤 음향 영상 컨트롤 박스에서 박희정 배우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희정 배우도 극단의 단원인데 일정이 맞지 않아 출연을 못하고 영상 영상 오퍼레이터로 참여하고 있었던 거죠.
제가 영화 <암살>을 통해 김원봉이라는 무장투쟁 독립투사를 새삼 인식했던 것처럼 이 연극에서도 1920년대 장교만으로 이루어진 지적이고 유머 넘치는 조선의용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모택동과 대만 장개석의 국공합작이라든지 하는 복잡한 정세의 흐름도 이 연극을 보면서 맥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극 중간중간 보여주는 사진과 동영상 자료는 정말 고마운 배려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요원 중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원이 죽임을 당한 이유가 일본의 밀정 때문이었으며 그 비겁한 인물이 이승만 정부에서는 오히려 독립투사로 둔갑해 호사를 하고 결국 천수를 누리고 갔다는 사실이 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중국 호가장 마을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김학철이 일본 감옥으로 끌려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몇 년 간 썩어가는 다리로 지내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났습니다. 다리 상처에 들끓는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내는 김세환 배우의 연기에서 많은 분들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제 아내는 물론 그 옆의 관객(그날 처음 인사를 나눈 제 책의 독자 조시진 님이었습니다)은 거의 대성통곡 수준이었죠.
연극을 보고 바로 리뷰를 써야 하는데 바쁜 일정 때문에 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뒤늦게라도 이 연극의 리뷰를 쓰려 마음먹은 이유는 제가 이런 감동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이고, 누군가는 이런 감동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무척 성공적이라는 것도 말하고 싶어서이고요. 이 연극을 통해 김학철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저처럼 2부를 기다리는 사람도 반드시 있을 테니 말입니다. 연극은 인류의 역사와 거의 같은 시간 동안 우리 곁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영상 매체가 발달하고 AI로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에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연극을 보는 걸까요? 그것은 눈앞에서 매번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작가·연출·배우·스태프 들의 노력을 직접 목격하는 쾌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건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이 극장에 와서 꼭 연극을 한 번 보셨으면 하는 겁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보는 게 더 나으니까요.
김재엽 작 연출 / 드림플레이 테제 21 작품 /
남명렬 김세환 김시유 백운철 이소영 정유미 이갑선 이다혜 장찬호 서정식 이태하 박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