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공처가의 캘리

by 편성준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
라고 이적이 노래할 때
아우 저려, 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아내가 깔깔깔 웃었다.


아내와 TV 보는 걸 즐기는 편이다. 한때는 일상이 너무 매몰되는 것 같아서 TV를 없앨까도 생각했으나 나의 직업이나 아내의 직업이나 매스미디어에서 도저히 떨어질 수 없기에 그런 생각 자체가 겉멋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마음을 고쳐 먹었다. 저녁에 밥을 먹을 때는 주로 <JTBC뉴스>를 틀어 놓는 편이고 <YTN뉴스>는 무시로 내가 아무 때나 트는데 아내는 그 방송국의 뉴스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안 볼 때가 많다.

우리가 거의 빠짐없이 시청하는 프로는 일요일 아침 9시 25분이 시작하는 SBS <TV동물농장>이다. 게으른 일요일 오전 기상 시간에도 잘 맞고 아내가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데다가 신동엽, 정선희, 토니안 등 패널들의 조합도 좋다. 더구나 얼마 전부터는 이 프로가 끝나고 JTBC로 채널을 돌리면 <방구석1열>과 바로 연결되어 이른바 '꿀조합'을 이룬다.

<알쓸신잡>처럼 콘텐츠도 강력하고 패널들도 우수한 경우엔 나중에라도 재방송으로 얻어걸려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로 찾아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차이나는 클라스>는 볼 때도 있고 안 볼 때도 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음악 프로그램도 즐겨보는데 <너의 목소리가 들려>나 <복면가왕> 같은 오디션 쇼는 처음엔 신기해서 보았으니 이젠 단물이 다 빠져서 그런지 재미가 없어 쳐다보지도 않는다.

우리가 싫어하는 건 <나 혼다 산다>나 <불타는 청춘> 같은 '관찰예능'이다. 지금은 워낙 대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을 한심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도대체 옳지도 않고 간절하지도 않는 출연자들의 고민과 무료함과 가식을 왜 우리가 지켜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캥핑클럽>을 예로 들어보자. 이효리나 옥주현이나 핑클이 싫은 게 아니라(사실 옥주현이 좀 싫긴 하다) 하나도 친해 보이지 않는 여자애들 넷이 나와 억지로 춤추고 우비 입고 물총 싸움이나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내가 싫어지는 것이다. <미운 우리새끼>도 마찬가지다. 거기 나오는 패널이 싫은 게 아니라 그걸 지켜보며 어른스럽지도 깊지도 않은 이야기를 남발하는 노회한 부모들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지만 그게 TV에서 방송된다는 것만으로 권위를 얻거나 공감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개그 콘서트>나<코미디 빅리그>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도 시들해졌으니 요즘 두 사람의 선호도가 겹치는 지점은 드라마일 때가 많다. 얼마 전엔 OCN <와쳐>라는 미스터리 드라마를 집중해서 봤는데, 특히 와신상담한 김현주의 열연이 돋보였고 이번 주에 끝난 <열여덟의 순간>은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이었지만 어른들의 이야기까지 견고하게 잘 얽혀 있는 드라마인 데다가 출연진 모두 고르게 연기를 잘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보았다. 이젠 우리동네에 사는 배우 박호산이 출연하는 OCN 드라마 <꽃파당>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도 드라마를 좋아해서 저녁에 <울 밑에 선 봉선화> 같은 고색창연한 연속극을 틀어놓고 혼자 훌쩍훌쩍 울기 일쑤였고 졸병들이 "편 병장님, 지금 7번에서 가요톱텐 하는데요..."라고 하면 "옆 내무반에 가서 봐!"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떤 땐 너무 심심해서 선임과 TV 드라마를 볼 때 볼륨을 0으로 줄이고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더빙 놀이'까지 하며 놀았다는 얘기까지 했을 땐 아내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비긴 어게인>은 시즌1에서 이소라가 너무 '예술가인 양' 하는 게 심히 꼴보기 싫어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시즌2 후반부에서 박정현과 헨리, 하림, 이수현 등이 보여준 케미가 너무 좋아서 시즌3까지 보게 되었다. 태연이 나와서 심수봉의 노래를 부를 때는 그냥 숙제 열심히 하는 학생처럼 느껴져서 안쓰러웠는데 이적이 나와 <다행이다> 등을 불렀을 땐 감동이었다. 가사의 뜻을 몰라도 마음으로 전달되는 게 외국인 청중들의 모습에서도 느껴졌다. 같이 TV를 보다가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라고 이적이 노래할 때 "아우 저려" 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누워있던 아내가 내 손을 탁 쳐내면서 깔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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