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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17. 2021

햄릿이 복수에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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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곽재식 작가의 책을 들춰보다가 어렸을 때 TV로 봤던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남자 주인공이 발가벗고 욕조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와장창 부서지더니 어떤 남자가 나타나 권총을 겨누며 외치는 것이었다. “드디어 널 찾았구나. 널 찾으려고 얼마나 많은 나날들을 온 세상 헤매고 다녔는지 아냐, 이 더러운 악당 놈아 죽어봐라...”

남자가 이렇게 막 떠들고 있을 때 주인공은 물속에 숨겨 들고 있던 권총으로 탕탕탕 그를 쏴서 쓰러뜨리고는 말한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든지. 뭐 이렇게 말이 많아.”

아마 그 영화는 테렌스 힐의 ‘내 이름은 튜니티’ 시리즈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셰익스피어 희곡 중에도 있다. 놀랍게도 그 작품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이다. 3막 3장에서 햄릿은 왕인 숙부를 죽일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하필 그때 숙부는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순간 햄릿은 망설인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죽이면 혹시 천당으로 가는 게 아닐까 하고.


햄릿)

지금 하면 딱 맞겠다, 지금 기도 중인데.

그래 지금 할 거야. (칼을 뽑는다)

음...

그럼 놈이 천당 간다.

그래서 내가 복수한다. 그건 따져봐야지.

악당이 내 아버질 죽였는데 그 대가로

유일한 아들인 내가, 바로 그 악당 놈을

천당으로 보낸다?

아니, 이건 청부살인이지 복수가 아냐.


아냐.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경기 도중 욕하거나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


이 장면은 다시 읽어봐도 웃긴다. 악당이 죽어 천당으로 갈까 봐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다니. 복수를 망치는 이유 치고는 참으로 절묘하고 웃기지 않은가.


소설가 곽재식은 글 쓰는 사람은 누구나 써보고 싶은 소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둘씩 있기 마련인데 정작 그걸 쓰는 데는 망설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 글은 정말 잘 써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쓰는 건 힘이 드니까 자꾸 미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김이 더 빠지고 기억마저 흐려지면 그 글은 탄생도 못한 채 그냥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몇 개 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빨리 써봐야겠다. 햄릿처럼 신중을 기하다가 바보가 되는 건 싫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망설이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써라. 쓰는 게 남는 거다. 적자생존이다(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아, 도서관에서 우연히 들춰보던 곽재식의 책 제목은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이다. 마음산책+북스피어+은행나무의 합동 프로젝트 제3탄 「작가특보」 시리즈 중 하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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