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가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자신의 일상에 실망하고는 한다. 오늘보다 어렸던 날의 나의 꿈은, 공책에 끄적였던 희망으로 남았고... 세상에, 내가 어른이다. 상상도 안 해봤던 나이가 되었다. 나의 이야기는, 그저 그런 소설 한 권인 걸까. 베스트셀러 근처에도 못 가본, 수많은 책 중에서도 가장 볼품없고 작은 페이퍼백으로 남는 걸까. 어느새 남들이 바라보는 나는 그런 걸까.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는 유난히 누군가 반겨주는 이도 없고, 뭔가 즐거울 일 하나가 없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만 빼곡히 남은 재미없는 하루. 아침에는 뭉그적, 일어나기 싫고, 밤에는 어그적, 잠들기 싫은 그런 일상.
매사에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이런 날은 하루 끝에 노력해도 주어지는 보상이 없는 것이 평소보다 더 서운하다. 그래서 괜한 어른이라는 자존심에 참지 말고 비뚤어지기로 한다. 자기 계발 따위 오늘은 없다. 남 생각도 안하리라. 나, 오늘 놀고먹고 아무 생각 없으리라! 어른의 탈선이다!
매일 오는 탈선의 날이 아닌 만큼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를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남은 잔재들을 깔끔히 정리하고,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어낸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과 나는 단절이다. 속세를 떠나 세속적인 즐거움을 홀로 만끽할 것이라는 앞뒤 안 맞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놀 준비를 한다. 그리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필요 없으니 넉넉히 시간을 들여 혼자서 만찬을 즐긴다. 편하게 앉아 재미있는 콘텐츠를 보며 밥을 맛있게, 원하는 만큼 먹는다.
해야 할 일들이 나를 줄줄이 기다리지만,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잠시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여러 글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느긋하다.
느긋한 와중에 또다시 머리 아프게 꿈을 꾸지 않도록 조심한다. 꿈은 허황된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꾸지 않는걸 습관 들이는 게 좋다– 고 나태한 나는 말한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이미 미래가 되었고, 이해하지 못해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나태하게 살아도 괜찮다– 고, 오늘은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저녁 나는 쉰다. 푸른빛 하루가 붉게 저물어 가는 것을 본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시간은 잘 간다. 물 흐르듯 흘러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굳이 희망찬 내일을 나에게 격려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이다. 케세라세라다. 내일도, 모레도, 느긋하게 쉴 수 있게 연습하련다. 꿈꾸기보다 놓기, 흘려보내기를 자연스레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봤자 뭐해!
오늘 외로운 것도, 미래의 너를 꿈꾸지 않으면 그렇게 외롭지 않다. 오늘 초라한 것 같은 내 모습도, 찬란할 나를 꿈꾸지 않으면 그저 평범할 뿐이다.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도, 행복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만 않으면 넘쳐흐르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한 그릇 마음에 담고 가다 어디 논밭에 거름이나 돼라 뿌려버릴 거다. 열심히 살아봤자 하등 소용없더라!
... 오늘만 이렇다는 거다, 오늘만. 가끔에 하루쯤은 괜찮다. 하루쯤 거꾸로 가도 내일 해는 뜬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려는 듯 마음 편히 나태할 수 있는 날은 고마운 날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날이고, 세상도 조금 쉬어가라 날 내버려 둔 날이기에. 잠들기 전 조금만 부끄러우면 된다. 오늘의 탈선은 우울할 수도 있는 나의 모습을 나태한 나의 모습으로 대신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언젠가의 꿈이었던 날들이 이미 나의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환희 없음에 나는 무척이나 실망했었다.
환하게 그 너른 바다를 밝히며 감동적으로 찾아오던 희망은 해가 완전히 떠오른 순간 일상이었고, 지나가던 길 돌아보게 만드는 풀꽃들만큼 은은하고 잔잔하게 다가오던 희망도 그 향기 속에 사니 곧 잊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숨 막히도록 무섭게 나를 옥죄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던 절망도 어둠에 익숙해지면 무료하기까지 했고, 한 대낮에 그 슬픔의 원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상냥하지 못하게 나를 바라보던 절망도 내가 빤히 바라보니 수줍어할 뿐이었다. 계절이 돌듯, 바닷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가듯, 늘 그렇게 번갈아 나를 찾아왔던 희망과 절망.
거창하기라도 한 운명의 주인공이라면 좋았을까. 원대한 꿈을 가진 이였다면 일상이 영웅담이었을까. 시시하리만큼 언제나 가까이에 있던 운명은, 희망과 절망을 너무 많이 번갈아 보여준 탓인지 결국 내게 설렘 없는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오죽 시시하면 이렇게 그 안에서 잠시 나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뚱멀뚱 구경하고 앉아있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에 무뎌진 날, 정말 이게 내 이야기가 맞나 고민하는 날, 나도 모르는 새에 내 곁에, 내 옆에 많은 것들이 서 있다가 또 간다. 그 많은 것들이, 한때는 그토록 바랬던 것들이 옆에 왔다 가는지도 모르고, 바로 내 앞에 서있는지도 모르고 인사조차 건네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게 매번 감사해야 할 순간조차 놓치기 일쑤니, 그저 매사에 감사해야 할 텐데.
몰라, 나 오늘 비뚤어졌다고.
그래도 내일 출근 준비는 하고 잘 거니까!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