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이 웅성대며 내 자리로 모여들었다. 나는 막 임원실에서 호출을 받고 불려 갔다 나온 참이었다. 출근시간 전부터 나를 다급하게 찾았다는 그 임원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임 임원으로, 내가 속한 본부의 임원이 아니어서 딱히 나를 찾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회의실은 구하셨어요?”
노크를 하고 임원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날카로운 질문이 들려왔다. 그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일주일 전쯤 교육 장소를 준비하면서 그가 예약해둔 회의실을 다른 곳으로 변경해줄 수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었다. 사내 회의실 중 교육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에는 한계가 있는데 하필 그 공간이 예약되어 있던 것이다. 나는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필요하시다면 다른 회의실을 예약해드리겠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싫은데요.”
그 회의실을 써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이 먼저 예약을 했고, 다른 회의실들은(넓어서, 좁아서, 밖이 보여서 같은 사소한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 임원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질적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만나온 임원들과는 조금 달랐다. 결국 나는 회의실을 포기하고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교육 시간을 줄이는 것으로 내부 조정을 했다. 그는 그날 일을 재차 따지기 위해 나를 부른 거였다. 들어보니 임원인 자신에게 일개 팀원이 회의실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몹시 불쾌하고 분한 것 같았다.
“그쪽이 하는 교육보다 제 미팅이 더 중요한 거예요. 아셨어요?”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지난 며칠간 그 일로 계속해서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변명을 하는 대신에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부득이한 상황이라 부탁을 드리는 입장이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라며 즉시 사과의 말을 전했고, 임원실에서 쫓겨나듯 밖으로 나와야 했다.
사실 회사의 회의실은 먼저 예약한 사람이 우선권을 갖고 사용하는 게 맞다. 그러나 부득이한 경우 서로 양보하고 조율하며 사용하는 공용 사무 공간이기도 하다. 정중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려 했던 나는 나의 일 처리 방식이 이렇게 아침부터 끌려가 혼날 만큼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작 회의실 하나를 두고 벌어진 신임 임원의 갑질이었다. 누가 봐도 억울한 사람은 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예전의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끝까지 할 말을 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잔뜩 언짢은 기분을 유지한 채 하루를 보냈겠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나는 사소한 일도 그냥 넘길 수 없고,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컨트롤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날은 온종일 나의 마음이 이전과 달랐다.
기분이 상해야 마땅한 일인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무례한 사람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나왔지만 딱히 억울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나를 향한 비난을 태연 하게 털어버리는 전과 다른 내 모습,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공황을 앓기 전 보다 정서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보세요.
나는 아직도 처음 정신과 진료를 받던 날 주치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는 공황장애는 마음의 병이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분명 좋아질 거라고 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진다는 게 어떤 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주문처럼 외우곤 했다.
공황은 나에게 마음을 돌보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어떤 일에 깊게 신경을 쓰거나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공황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평소에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이런 고약한 병에 걸릴 수 있음을 실감한 나는 수시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했던 생각과 감정을 멀리하는 방법들을 찾게 되었다. 100점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 들라 치면 조용히 ‘80점이어도 괜찮아’라고 다짐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압박하는 대신 ‘하지 않아도 돼’라며 마음에 힘을 빼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 나를 향한 비난이나 악플에는 가만히 귀를 닫고 미웠던 사람에게 먼저 화해를 청한 것도 다름 아닌 내 마음을 위해서 한 일들이었다.
마음을 돌보는 것과 더불어 몸의 컨디션에도 관심이 간다. 생각해보면 처음 공황을 만났던 시기에 나는 쫓기는 듯 바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워킹맘으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지만, 밤늦게 출간 작업과 그림일기 연재까지 무리해 소화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심리적인 압박이 더해져 공황을 만났다.
요즘 나는 전처럼 밤을 새워가며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려고 차디찬 커피를 들이켜는 대신 하던 일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선택을 한다. 항상 충분할 만큼 잠을 자고 양질의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몸의 건강을 생각한다. 내가 내 몸을 혹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는 공황을 앓기 전보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더욱 건강해졌다. 지금 내가 알고 실천하는 모 든 것들은 공황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놀랍게도 나를 그토록 괴롭게 했던 지독한 공황이 나를 더 성숙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내가 가끔 읊조리는 유명한 기도문이 있다.
신이시여,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 정심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용기를, 그 리고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하루의 순간을 한껏 살아가고 순간을 즐기며 고난은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분명한 건 인생에 찾아온 모든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남은 삶에 영향을 끼치고 또 일부가 되어 남는다는 거다. 어떤 좋지 않은 일과 마주하고 있다면 용기를 내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보는 건 어떨까? 여러분도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더욱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어느 회사원의 공황장애 극복 에세이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에 수록된 글/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