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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개미 Feb 21. 2023

조물주의 마음으로 스러진 나를 위로합니다

실패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법: 이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직장인에게 겨울만큼 가혹한 계절이 있을까? 매년 12월이 되면 회사에서 일 년의 성과를 평가받는 인사고과의 시즌이 돌아온다. 고작 알파벳 한 글자로 표현되는 단순한 결과지만, 평가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보람을 느끼고 누군가는 씁쓸함을 맛본다. 이 정도면 한 해를 알차게 보냈다 생각했던 나는 내심 평가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회사 이름으로 대외적인 인증과 수상까지 했던 터였다.  


그런데 면담 분위기가 시작부터 조금 이상했다. 그렇다, 내가 기대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사는 내내 불성실한 태도로 ‘올 한 해 누구보다 열심히 해 줬고 팀에 기여한 부분도 인정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네 평가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 말하며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팀장인 자신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로 만족하라’는 앞뒤 안 맞는 말을 늘어놓았다.

 

순간 혼란스러다. 직장인에게 유일한 인정이란 공정한 평가와 보상 외엔 없다고 믿는 나는, 팀장의 말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는 건 공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말뿐인 인정은 의미가 없으니까. 설명을 들을수록 평가자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고백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 같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속도 상했다.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날은 온종일 머릿속에 이 말이 떠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가 있다. 처음 한두 번은 운이 나빴나 보다며 쿨한 척 넘겨 보지만, 그럴 때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억울한 마음이 삐죽 고개를 들면 습관적으로 세상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어쩜 이토록 내 마음을 몰라주냐고, 도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미친 듯이 원망을 쏟아내도 후련해지기는커녕 답답하기만 하다. 어느 것 하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 회사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순간다.

나는 안다. 그 누구라도 반복되는 실패로 인한 상실감을 겪으면 쉽게 무기력해지고, 새롭게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매번 이러한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유리병 속 작은 지구, 테라리움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절망적인 마음을 위로하기에 아주 적당한 식물이 있다. 그건 바로 이끼, 정확히 말하면 ‘이끼 테라리움’이다. 테라리움(terrarium)은 밀폐된 용기 안에 흙과 식물을 담아 키우는 원예 방법이다. 처음엔 꽉 닫힌 병 속에서 과연 식물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곧 이것이 자연의 원리를 적용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물을 주고 뚜껑을 닫으면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이 잎을 통해 배출되고, 물방울로 변해 유리벽에 맺혔다가, 다시 식물로 떨어지는 '자연순환의 원리' 말이다. 물과 산소의 순환이 병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테라리움이 하나의 생태계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테라리움에는 ‘작은 지구’라는 별명이 있다.


처음 테라리움을 접한 날을 기억한다. 인사동의 한 공방 앞을 지나던 중 창가에 쪼르륵 놓인 유리병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병 속에는 초록색의 식물이 담겨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끼였다. 수분을 잔뜩 머금어 촉촉한 이끼들이 돌이나 또 다른 식물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자연(nature)'이라는 단어가 팝업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예뻐서 한참을 구경했다. 


테라리움을 만들기로 결심한 건 그로부터 며칠 후다. 눈에 아른거리는 작은 지구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나는 결국 다시 공방에 방문했다. 운 좋게 약간의 비단이끼를 구입했고, 나머지 재료는 집에 있는 걸 사용하기로 했다. 지름 약 12센티의 유리병을 준비해 맨 아래부터 마사토와 야자숯, 상토 순서 쌓아 올렸다. 야자숯은 밀폐된 내부의 습도를 조절해 준다 하여 두툼하게 넣고, 흙은 수분을 오랫동안 머금는 피트모스 상토를 사용했다. 금세 토양이 완성되었다. 


토양에 이끼를 옮겨 심을 땐 그야말로 세상을 창조하는 조물주의 마음이 되었다. 한가운데에 돌을 넣어 자리를 잡은 다음, 이끼를 손으로 조금씩 쪼개어 돌 주변에 눌러 심어 주었다. 한 구석엔 파란색모래를 뿌려 바다만들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집 모양의 오너먼트를 넣으니 요정들이 사는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어쩌면 신 우리를 이런 방법으로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이끼의 위로


이끼들은 아주 순하고 착해서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잘 살아주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이란 그저 1~2주에 한 번씩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한참을 잊은 적도 많다) 분무기로 물을 주거나, 아주 가끔 뚜껑을 열어 환기를 시켜주는 일뿐이다. 이런 게으른 집사의 작은 정성만으로도 결코 썩거나 무르지 않고, 특유의 초록색을 유지하며 매 순간 내게 기쁨을 다.


뿐만 아니라 이끼 아주 특별한 향기를 가졌다. 한 번은 분무기로 물을 주고 있는데 코끝에 은은한 어떤 향이 느껴졌다. 혹시나 하고 병에 코를 가까이 대보니 이끼에서 나는 향기였다. 어딘가 익숙한 깊은 산속에서 맡을 수 있는 진한 숲의 향, 피톤치드다. 알고 보니 이끼는 다른 식물 보다 산소배출이 뛰어날 뿐 아니라 편백나무보다 더 많은 피톤치드를 내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착하고 기특한 이끼 덕분에, 미세먼지 가득한 날에도 몸과 마음을 정화하며 살아간다.


사실 내가 이끼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현실과 달리, 테라리움은 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어 입으로 '후' 바람을 불면 이끼들은 바람이 분다며 기뻐할 것만 같고, 분무기로 ‘칙 칙’ 물을 뿌리면 드디어 비가 온다고 좋아하겠지. 닫힌 뚜껑 위로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을 보면 이 작은 온실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뿌듯해진다. 살아 숨 쉬는 작은 생태계를 품는다는 건 그 사실 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어른이 된 후 자주 이 세상은 원활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결이란 애초에 무언가에 기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매번 절망에서 빠져나와 다시 일어서는 이유가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지속적으로 꾸려가고 싶다는 바램이 있는 한, 나는 계속 도전하고 기대하고 실패하고 좌절할 것이다. 참 다행인 점은, 이끼를 돌보는 동안만큼은 찌질이가 아닌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한다는 것. 그래서 마음을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끼가 인간의 절망적인 마음을 위로한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든다.



글 그림: 김세경(꽃개미)

회사원이자 작가.

그림에세이『엄마가 되었지만, 저도 소중합니다』,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의 저자.

메일: sammykh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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