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삶과 맞닿아 있다.

죽음을 외면해온 나날들

by 고밀도

우리는 자연스레 죽음을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매일 버튼을 누르는 ‘F층’과 때로는 찾지 못하는 건물과 아파트의 4호들. 실제로 마흔이 될 때까지 죽음이란 주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던 경험은 없다. 매일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에서는 죽음은 ‘부정’ 타는 단어로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여의였던 나는 실제로 삶에서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고, 죽음이 생과는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있다고 여겼다. 7살 아들이 해맑게 죽음에 관련된 질문을 하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니?’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했다. 암 투병하는 엄마가 있기에 나도 모르게 죽음은 상실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피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큰 딸인 나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난소암 6년 차에도 보험회사를 쉬지 않으며 수첩에 나갈 돈과 들어온 돈을 기록하던 엄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논의하고 싶어 했다. ‘엄마가 죽으면 말이야.’라고 말문을 열면 나는 뒤의 문장을 듣기도 전에 엄마를 막았다. ‘엄마, 아직 먼 이야기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보내자.‘ 엄마는 죽음이 멀지 않음을 일찌감치 알았을 것이다. 나는 죽음이 코 앞까지 왔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엄마의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보이던 장례식장이 편치 않았음을 고백한다.


낙엽이 아름답던 가을 날, 엄마의 죽음은 예상치도 못하게 내 삶을 치고 들어왔다. 환절기의 기침이 순식간에 폐렴으로 번졌다. 엄마는 산소 호흡기를 하고 있었지만 곧 퇴원할 것 같은 눈빛을 보냈다. 엄마가 말 한마디를 하려면 기침을 동반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곧 빠져나갈 카드값과 그동안 부어 놓은 아빠의 보험금 현황을 적은 노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제야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이야기임을 알았고, 퇴원하면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마음을 먹고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뒤를 도는 순간, 엄마의 의식은 희미해지고 2주 동안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온전히 차리지 못하다 내 곁을 떠났다. ‘죽음’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한 채 엄마를 보내고 말았다. 다행이면 다행이랄까?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눠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엄마는 자신의 휴대폰에 메모를 남겨두었더랬다.


죽음은 그렇게 내 삶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이 왜 나를 슬프게 하는지, 왜 이렇게 죽음이 억울한지,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에 대해. 그렇게 2년이 흐르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직도 엄마는 사무치게 그립지만, 이제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덤덤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타자를 치고 있는 것이 그것의 반증이다. 그동안 글을 쓰려고 하면 흰 종이에 글을 채우기보다 얼굴에 눈물을 한가득 채웠다. 이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한 단어를 묵상한 결론은 ‘죽음은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늘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죽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죽음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매일 아침을 새로 깨우고, 생명력 넘치는 아이의 성장을 돌본다. 그리고 다시 죽을 날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열심을 다해 일상을 살아간다. 지금도 눈물을 훔치며 쓰고 있는 이 글에 마침표를 찍으면 나는 ‘일찍 자야 키가 크지.’라는 뻔한 레퍼토리로 아이를 재우러 갈 것이다. 죽음과 삶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이 다른 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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